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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공통알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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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책상에서 - 오르한 파묵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작성자
송지연
작성일
2013.07.08
조회수
1,439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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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책상에서>라는 제목은 사실 제가 임의로 지어본 것입니다.
원래의 제목은 <아버지의 여행가방>입니다.

변방의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열등감,
그리고 중심부로 가고 싶다는 뾰족한 열망(중심부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비단 (이 글을 읽고 울며 필사하던) 어린 시절의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우송대학교 학생들에게도 중대한 화두일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진실한 고백은 (어떤 분야든) 자기세계의 치열한 성숙과 완성을 진정으로 이룬다면 
누구나 분노와 모멸감, 열등의식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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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마음 속 한편에는 모든 것을 향한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읽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삶이 어떤 식으로든지 무엇인가 '부족한' 삶이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감은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당시 이스탄불에 사는 우리 모두가 느꼈던, 변방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뭔가 부족한 삶에 대해 우려하던 또다른 이유는 그림을 그리든 문학을 하든, 예술가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희망도 주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치 제 삶에 결여된 이것들을 없애기라도 하듯 탐욕스럽게 이스탄불의 고서점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빛바랜 중고 서적들을 구입해나갔습니다. 중고 서적들을 구입하던 1970년대의 이 고서점들과 길가, 사원 마당, 허물어진 벽의 턱에 자리 잡은 서점들의 옹색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줄 만큼 무질서한 상태는 제가 읽은 책들만큼이나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세계, 즉 삶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의 저의 위치에 대해 제가 품고 있었던 근본적인 명제는 제가 '중심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부에는 우리의 삶보다 더 풍부하고 매력적인 삶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스탄불의 모든 사람들, 터키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중심부 바깥에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이 생각을 오늘날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되 그 중심은 저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실상 제가 생각했던 것은 서양문학이지 세계문학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터키인들은 그 경계 밖에 있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고, 더욱이 깊은 모멸감, 자신감 부족 그리고 무시당한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살고 있다는 것을 저 자신의 경우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인류의 가장 커다란 고민은 땅도, 집도, 먹을 것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텔레비전과 신문은 이러한 근본적인 고민을 문학보다 더 빨리 그리고 쉽게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학이 진정으로 설파하고 연구해야 할 것은 인류가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소외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이와 연관지어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한 공동체가 집단으로 경험하게 되는 모욕들, 멸시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다양한 분노, 초조, 끊임없이 무시당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족적 자만심과 우월의식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대부분 비이성적이며 지나치게 감상적인 언어로 반영되는 이 환상들을 직면할 때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제 내면에 있는 어둠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서양 이외의 다른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공동체 그리고 민족들이, 멸시받는다는 우려와 초조 때문에 때로 바보스러울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양세계에서도 르네상스, 계몽주의, 모더니즘을 발견했다는 것과 부유함이 안겨주는 지나친 긍지로 민족들과 국가들이 때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만심에 휩싸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우리를 오랜 세월 동안 방에 가두는 것은 이와는 정반대의 것인 어떠한 믿음입니다.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순진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주변부에 있다는 분노에서 비롯한 상처와 고뇌가 뒤섞인 낙관주의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서양에 대해 느꼈던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저 역시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서 진정으로 배운 것, 진정한 낙관주의의 원천은, 이 위대한 작가가 서양과의 애증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이 애증의 다른 쪽에 세운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글쓰는 일에 평생을 바친 모든 작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이유와 오랜 세월 동안 희망을 갖고 쓰고 또 쓰며 세운 세계는 결국 아주 다른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는 슬픔 혹은 분노에 이끌려 앉았던 책상에서 그 슬픔과 분노 너머에 있는 아주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부에서, 시골에서, 외곽에서 분노하거나 슬픔에 싸여 있기 때문에 책상 앞에 앉고 나서야 이 감정들을 잊게 하는 아주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르한 파묵,「아버지의 여행 가방 -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中 (이난아 역,『문학동네』50집 봄호, 2007, pp.487~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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