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탐색]부의 창출에 성공하면 탐욕은 사라질까
| 기사입력 2013-06-26 10:25
영국 워릭대학교 정치경제학 교수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3부작 케인스 전기로 유명한 케인스 전문가다. 그의 케인스 전기는 2009년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됐는데, 분량이 1512쪽에 달한다. 정치학 박사인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미래 전망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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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김병화 옮김·부키·1만6000원 |
케인스는 1930년 발표한 에세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노동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미래’를 전망했다. 기술의 진보가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를 불러와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여가는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케인스의 발언은 대공황의 충격이 미국과 유럽을 강타하던 무렵 나온 것인 데다 그가 ‘노동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미래’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 시점이 2030년이긴 하지만, 저자들은 케인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케인스가 꿈꾼 것은 “지금은 예술가와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이들에게서나 보이는 삶에 대해 자발적이고 즐거운 태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케인스의 관심사는 모든 인간이 ‘좋은 삶’을 누리는 세상이었다는 게 저자들의 시각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장된 ‘끝없는 탐욕’은 이런 ‘좋은 삶’과는 양립할 수 없다. 케인스는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탐욕이 부의 창출에 기여하는 측면을 인정하면서, 일단 부의 창출에 성공하고 나면 ‘탐욕’이라는 악덕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더 나은 여가를 추구할 것이라고 봤다. 물론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세상은 케인스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성장은 더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가 됐다. 2008년 이후 세계 경제를 파탄에 빠트린 금융위기에 동력을 제공한 것은 맹목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끝없는 욕구’다.
저자들은 이 같은 ‘끝없는 욕구’를 제어하려면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 저자들이 ‘기본재’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본재를 어떻게 만인이 부족함 없이 나눠 가질 수 있을까. 저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두 가지다.
일자리 나누기·주간 노동시간 제한법 등으로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노동 압박을 제도적으로 줄이고, 노동시간 감소가 소득 감소로 이어지지 않도록 모든 사람에게 조건없이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그래야만 ‘인간성의 탕진’이라는 무한경쟁 시대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저 |
김병화 역 |
부키 |2013.06.14
원제 How much is enough? : the economics of the good life
끝없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다
오늘 우리의 삶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경제 체제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정신적 뿌리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나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이들 고전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역사의 고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현실로 한 걸음 바투 다가와 끝없는 욕구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성장 지상주의에 맞서 활발히 활동 중인 행복 경제학과 환경주의의 논의조차도 진지한 비판적 성찰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모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더욱 심한 경쟁의 쳇바퀴로 내몰려야 하는 기막힌 역설을 뿌리부터 추적한다는 점도 이 책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출하는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정작 우리는 개화된 용도로 그 부를 활용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공저자들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그 배경에 깔린 철학사상의 변천을 통해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의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관심을 잃고 질문조차 포기한 ‘좋은 삶’이라는 과제를 되살리려는 묵직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부자 관계인 공저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매력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는 케인스가 살짝 운만 뗀 ‘바람직한 미래상’을 길게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부터 구현해 나가자는 담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추천사 / 들어가는 말 / 서문
1장 케인스의 오류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 / 케인스 예견의 운명 / 평균값은 전형적인 상황을 반영하는가 / 케인스의 예견은 왜 틀렸는가 / 일의 즐거움과 여가에 대한 두려움 / 근로 시간을 줄일 수 없는 노동자들 / 끝없는 욕구와 상대적 필요 / 맺음말
2장 파우스트적 협상
유토피아의 이념 : 꿈에서 역사로 / '탐욕'을 '이기심'으로 정당화하는 경제학자들 / 문학적 은유로서의 파우스트 / 마르크스의 실패한 묵시록 / 보상받지 못한 자본주의 : 마르크스에서 마르쿠제까지 / 맺음말
3장 부의 용도
근대 이전의 경제 사상 /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경제에 관한 사고방식 / '좋은 삶'이라는 개념의 소멸 / 맺음말
4장 행복이라는 신기루
매우 짧은 행복의 역사 / 행복 경제학 / 행복 경제학의 문제점 / 측정의 문제 | 윤리적인 문제 / 맺음말
5장 성장의 한계, 자연적인가 도덕적인가
성장의 한계 / 환경주의의 윤리적 뿌리 / 자연과의 조화
6장 좋은 삶의 구성 요소들
기본재의 기준 / 기본재 일곱 가지 / 기본재의 실현 / 맺음말
7장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기
우리의 과제 / 다시 찾아본 덕 / 기본재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 정책 / 일하라는 압력 줄이기 /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 소득' 구상 / 소비하라는 압력 줄이기 / 광고 줄이기 / 국제적 함의 / 맺음말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돈을 벌고 얼마나 성장해야 만족할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일까
이 책은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우리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인 동시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매력적인 청사진이다.
케인스는 1930년에 발표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경제 성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하는 세상이 100년 후면 도래하리라고 전망했다. 8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성장에 관한 그의 전망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지만 좋은 삶은 가뭇없이 멀기만 하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아들인 철학자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철학과 역사, 경제학의 전망을 한데 합쳐 그 원인을 추적한다.(서문, 1장)
저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대가로 상상도 못한 힘을 얻은 파우스트 전설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읽는다. 풍요를 위해 채택한 자본주의가 심어 놓은 습관 때문에 우리는 풍요로울수록 좋은 삶을 즐길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음을 논증하고(2장), 좋은 삶의 요건을 찾아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철학과 종교, 역사의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뒤지고(3장), 성장 지상주의를 논박하며 나온 행복 경제학과 환경주의의 최근 성과와 한계까지 치밀하게 검토하여(4장, 5장) 좋은 삶을 위한 기본재인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라는 개념을 끌어낸다.(6장)
경제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 이러한 기본재를 보장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리 세대의 목표를 변경해야만 파우스트와의 악마적 계약을 끊고 무한 경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담대한 제안과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 대안들까지 충실히 제시(7장)함으로써, 이 책은 우리 세대가 질문조차 잊고 포기할 뻔한, 좋은 삶을 향한 ‘인류의 오래된 미래 기획’을 적극적으로 되살린다.
기발한 재담을 발전시킨 담대한 제안
1928년 경제학자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부생들 앞에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강연을 펼쳤다. 사실 이 강연의 목적은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면서 갓 태동한 소련을 횃불 같은 존재로 보게 될 학생들에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효율적인 유토피아 기획임을 납득시키는 데 있었다. 2년 뒤 강연 내용은 수정을 거쳐 같은 제목의 짧은 에세이로 출판되었다. 케인스는 에세이에서 자본주의가 펼칠 바람직한 미래상을 보여 주기 위해 경제 논리를 적절히 활용해 손자 세대의 세상 모습에 대한 예언을 내놓았다. 자본 축적과 기술 진보에 의해 100년 뒤 선진 국가에서의 생활 표준은 4배에서 8배까지 더 높아져 있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어 인류는 처음으로 경제적인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여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하는 자신의 진정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케인스가 내다본 2030년은 불과 17년 뒤이다. 그의 손자나 증손자뻘이지만 일주일이 아니라 하루 15시간 노동도 낯설지 않은 우리 세대가 보기에, 이 예언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음미할 가치조차 없어 보인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그럼에도 이 빗나간 예언을 다시 꺼내든다. 물론 실패한 예언자를 변호하거나 책임 추궁할 목적은 아니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모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더욱 심한 경쟁의 쳇바퀴로 내몰려야 하는 기막힌 역설을 뿌리부터 추적하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케인스의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 1930년대 동시대인에게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설명한 한편의 기발한 재담이라면, 이 책은 인간의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관심을 잃고 질문조차 포기한 ‘좋은 삶’이라는 과제를 되살리려는 묵직한 프로젝트이다. 부자 관계인 공저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매력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는 케인스가 살짝 운만 뗀 ‘바람직한 미래상’을 길게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부터 구현해 나가자는 담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파우스트적 협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사실 성장에 대한 케인스의 전망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세계 경제의 1인당 소득 성장이 2000년 이미 4배를 넘어섬으로써, 그의 예견 범위 안에 멋지게 들어왔다. 틀린 것은 노동 시간에 대한 전망이었다. 저자들은 이 가정이 실패한 이유를 생산성 증가로 인한 이익을 노동자들이 갖지 못하게 된 상황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인간의 끝없는 욕구 탓으로 본다. 이 두 장애물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소유욕의 윤리를 만들어 내고, 이 윤리는 사회가 목적도 없는 부를 계속 창출하도록 운명 지운다.
결국 케인스의 오류는 자본주의가 해방시킨 돈벌이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인간의 절대적 필요를 채우고 나면, 사람들은 문명 생활 속에서 그 결실을 자유롭게 맛보게 되리라 믿은 데 있다. 자본주의가 끝없는 욕구를 창출하는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대가로 상상도 못한 힘을 얻는다는 파우스트 전설에서 인류가 잠시 이용하려다 오히려 그 포로가 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읽는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파우스투스 박사』를 비롯해 18세기 괴테의 『파우스트』, 1947년 발표된 토머스 만의 소설 『파우스투스 박사』등 서구에서 끊임없이 변주된 파우스트 전설은, 악은 그저 물리쳐야 하는 부정적 특질이 아니라 인간사에서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전의 경제 관념에서 돈에 대한 애착은 도덕적으로는 상스럽고 역사적으로는 파괴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계약과 같이 좋은 결과를 위해 악한 동기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르익으면서 자본주의는 돈을 숭배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족쇄를 풀어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목적 달성을 위해 백성의 변덕과 탐욕을 이용하는 군주를 현명한 군주로 상정했고 사회사상가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가 이를 계승했다. 경제학에서는 버나드 맨더빌이 도덕률을 새로 제시했다. “부유하면서 악하거나 가난하면서 덕성스러울 수는 있으나 부유하면서 덕성스러울 수는 없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점차 탐욕이라는 낡은 단어는 밀려나고 이기심이라는 무색무취한 단어가 들어섰다. 일단 그 윤리적 불명예를 떨쳐 버리고 나자 돈벌이는 공개적으로 인과관계에 입각하여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를 선도한 것은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였다. 파우스트적 협상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면에서는 마르크스 같은 혁명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탐욕과 고리대금이라는 악마는 인간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준 다음 무대를 떠날 것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해방되었지만, 모든 동화가 그렇듯이 악마의 계약은 말뿐이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출하는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정작 우리는 개화된 용도로 그 부를 활용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공저자들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그 배경에 깔린 철학사상의 변천을 통해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확인한다.
인류의 오랜 지혜 창고를 여는 경제와 역사, 철학의 협업
지금처럼 분과 학문 체계가 서기 전에는 경제학도 ‘도덕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철학과 긴밀히 연결되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도덕 과학은 가치 판단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생산적이면서도 공정한 경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고민하던 학문이었다. 두 공저자들, 세계 최고의 케인스 전문가인 아버지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미학과 도덕철학을 전공한 철학자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간의 공동 작업은 이 책의 독특한 강점을 형성한다.
파우스트적 계약에 기초한 자본주의 성립 과정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질문을 되살리기 위해 인류의 오랜 지혜 창고를 여는 데서도 이 협업은 빛을 발휘한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동서고금의 다양한 경험과 지성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과거 철학자들이 힘주어 제시했던 좋은 삶의 이상이 근대 이후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 최근 들어 이 이상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유려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현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이라고 알고 있는 내용은 그의 저서 『정치학Politika』과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 실린 획득과 교환을 각각 다룬 두 단원을 조합한 내용이다. 이러한 논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업은 우리의 공동생활의 한 측면으로서 삶의 다른 모든 면들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그 자매 격인 덕성에 종속되는 것으로 소개된다.”
저자들이 공들여 되살려낸 인류의 경험을 살펴보면, 돈에 대한 끝없는 추구가 개인이나 사회 전체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칭송받는 일은 역사 전체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또는 누군가 부채질한 탐욕에 휘둘린 탓인지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것이 이 야심찬 책의 목적이다.
삶과 정책의 목표를 돌아보게 하는 ‘돈과 좋은 삶의 인문학’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오늘 우리의 삶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경제 체제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정신적 뿌리를 검토한다는 측면에서는 이 분야 고전인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
소득을 기대할 수 있을 때만 행동할 마음이 생긴다는 선천적인 게으름뱅이로서의 인간상은 근대 특유의 것이다. 특히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려면 당근이든 채찍이든 자극이 있어야 하는 노새 같은 일짐승이라고 본다. 근대 경제학 이론의 개척자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는 인간의 문제가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큰 만족을 충족”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고대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없었다. 아테네와 로마에는 경제적으로 생산성이 낮더라도 정치, 전쟁, 철학, 문학 분야에서 최고 수준으로 왕성한 시민들이 있었다. 왜 그러한 시민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지 않고 일만 하는 당나귀를 지침으로 삼는가. ---pp. 30~31
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좋은 삶을 이루는 물질적 조건이 적어도 세계의 부유한 지역에서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만 맹목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좋은 삶은 계속 다른 것들에 밀려나 버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책이나 다른 공동의 행동 양식의 목표는 건강, 존중, 우정, 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모든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은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여분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p. 36
케인스는 사회적으로 발생한 끝없는 욕구의 망령을 지적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의 에세이 나머지 부분은 필요라는 것이 모두 절대적이라는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왜 그렇게 했을까? 상대적 필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가계 소비의 대부분이 식비와 주거비, 의류와 난방 등의 항목에 들어가던 시대였다. 경쟁적 소비에 드는 돈은 전체로 보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그러한 사정은 뒤집어졌다. 빈민층조차 가계 소비의 큰 부분이, 아무리 보아도 물질적으로는 꼭 필요하지 않지만 지위를 유지하는 용도라는 항목에 들어간다. ---p. 71
마르쿠제는 육체적 욕망만이 아니라 욕구의 정도도 간과해 버렸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욕구의 증가는 사악한 생산 기구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이러한 기구에서 놓여 나기만 하면 우리의 욕구는 정상적인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도덕적 규율의 견제를 받지 않는다면 욕구가 자체적으로 증식된다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1960년대의 쾌락주의는 자연스럽게 1980년대의 소비주의로 이어졌다. ---p. 119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노예를 소유한 과두정치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 여겨져 폄하되곤 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좋은 삶의 비전은 그가 살던 시대와 장소에 다분히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자연에서 맛보는 기쁨이나 고독이 차지할 여지가 없고, 기독교나 낭만주의가 맛보게 해 준 종교적 황홀경이나 예술적 창조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의 자유인 남자들만의 몫이었다. 여성, 야만인, 노예들은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을 박탈당했다. ---p. 135
유럽과 인도, 중국과 같은 오래된 문명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모두들 상업은 정치와 명상 아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다른 활동을 종속시켜 자신을 목적으로 섬기게 만드는 능력을 인식하고 또 우려했다. 모두들 돈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하나의 예외적인 현상으로 간주했다. 각기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가지 거대 문명이 이러한 점에서 공통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 ---p. 147~148
좋은 삶이라는 이념의 쇠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앞 장에서 우리는 좋은 결과를 위해 악한 동기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발전해 온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맨더빌, 괴테, 마르크스, 마르쿠제, 케인스 등 우리가 살펴본 저자들은 악한 동기가 정말로 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착각도 하지 않았다. 설사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악한 동기를 부추겼을지는 몰라도 그들 자신은 공정함fair이 반칙foul이고 반칙이 공정함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 동안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운동의 사상이 있었는데, 그 둘이 한데 합쳐지자 공정함과 반칙이라는 단어 자체가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운동 중의 하나는 근대의 자유주의 이론이며 또 하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다. 이 두 운동이 힘을 합쳐 공적인 논의의 장을 사실상 독점했으며 과거의 윤리 전통을 주변부로, 반문화적인 위치로 밀어냈다. ---p. 149
‘행복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새 분야는 선진 세계의 시민들이 전반적으로는 상당히 행복해졌지만 더 행복해지지는 않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겠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1974년 이후 1인당 실질적인 국내총생산Gross Demestic Product, GDP은 2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행복 지수는 거의 높아지지 않았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생활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소득의 절대적 크기와 행복은 무관해지는 것 같다. 이에 따라 행복 경제학은 선진국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국내총생산이 아니라 국내총행복Gross Domestic Happiness, GDH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비판은 외면당하지 않았다. 2010년에 데이비드 캐머론David Cameron(보수당 출신의 당시 영국 총리.-옮긴이)은 전통적인 거시 경제적 지수를 보완하는 새로운 ‘웰빙 지수’를 공개했다. 이제 행복은 진지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 ---p. 165
물론 대부분의 행복 경제학자들이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책 방향을 부의 맹목적인 추구로부터 생활 여건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쪽으로 돌려놓으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다른 방향을-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객관적으로’-가리키고 있다. 만약 행복이 잘 사는 것과 내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그저 사적인 기분에 불과하다면, 소마나 두뇌 자극술이 가장 값싸고 효과적으로 행복을 달성해 줄 수단임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왜 우리의 관심이 좋은 삶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행복은 스스로를 돌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가? ---p. 206
환경론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외에도 더 있다. 역병과 폭풍우에 대한 예언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겠지만 절제를 권장하기에는 아름다운 방식이 아니다. 덜 채우는 삶이 좋은 삶이며 그 자체로도 더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삶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더 친절하고 아마도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예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근사한 돔과 장식을 선호하던 독일 로코코 양식이 “공포가 아니라 기쁨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공포에 의존하곤 했다. 우리는 기쁨에 의거해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염원한다. ---p. 210
개인의 제1목표가 자신의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제1임무는 능력이 닿는 한에서 모든 시민의 좋은 삶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정의의 이 원리는 앞에서 논의된 대로 상호 존중이라는 좋음에 기초한다.) 이때 “능력이 닿는 한”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건강과 우정은 다분히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이에 비해 개성, 존중, 여가는 부분적으로 개별 주체에게 달린 문제이지만 국가는 이런저런 좋음들이 번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고도 정당한 역할을 맡는다. ---pp. 277~278
사실은 최근까지 서방 세계의 공공 정책은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으로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관한 이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념들은 실패할 운명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정치 투쟁에서 패했을 뿐이다. 그 이념들 중에는 공적 생활의 표면 아래에서나 주변부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 있는 것들도 많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사회라는 이념을 중심부의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p. 303쪽
1974년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영국 총리가 주당 사흘만 일하도록 했던 두 달 동안 생산에서 손실은 거의 없었다. 1980년대에 폭스바겐 사는 노동자 3만 명을 해고하지 않기 위해 노동 시간을 주당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단축했다. 이때 공장의 재편은 실제로는 생산성을 높였다. 근로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은 공장들이 더 자주 작업 교대를 시켜야 한다는 뜻이므로,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더라도 공장의 가동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되고, 따라서 단위 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p. 318
소비는 현대 사회의 위대한 위약僞藥, placebo이다. 다시 말해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노동하는 데 대한 거짓 보상이 되었다. 부모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나 새로운 기기를 쏟아부어서 강박적 소비주의를 물려준다.24 시장에 강요된 여러 가지 혁신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노동 시간이 줄어들지 못하게 막는 소비 경쟁 무대는 그대로 둔 채 주변적인 개선에만 그친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큰 불평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가 일거리는 너무 많이 만들어 내는 데 비해 여가 및 그것에 뒤따르는 우정, 취미, 자원봉사 같은 것은 불충분하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p.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