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책’이 경험전수, 밥상서 취미나눔…공동체가 움튼다
| 기사입력 2013-06-25 20:45 | 최종수정 2013-06-25 21:26
[한겨레] 공유경제가 뜬다 ⑥ 경험·취미
사소할 수 있지만 남들이 모르는 경험과 지식은 혼자 알고 있기에 너무 아깝다. 관심사와 취미도 홀로 누리기보다 주변과 나눌수록 커지고 풍성해진다. 이런 나눔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들면 공동체의 결속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제 차가 12년 된 중고인데, 이번에 미션(변속기) 쪽 수리비가 많이 나왔어요. 차를 바꿀까 고민이에요.” “충분히 더 탈 수 있습니다. 대신 환기를 자주 해야 해요. 엘피지 차량은 정비를 오래 안 하면 가스가 실내에 유입되거든요.”
지난 20일 오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정보도서관 지하 1층 ‘사람도서관’(humanlib.or.kr). 오래된 승용차를 놓고 고민중이라는 김지훈(33)씨가 자동차정비사 자격증이 있는 정성우(43)씨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에는 김씨 등 노원구 주민 6명이 셋씩 짝을 이뤄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차량관리·요리비결·재테크술 등
이웃이 ‘사람책’ 되어 전달해줘
밥 매개로 한 관심사 얘기모임
자발적 참여자들 늘어 활성화
공유 바탕으로 수익 창출하고
넓어진 관계망은 공동체 결속 효과
옆 탁자엔 여성 셋이 모였다. 인터넷 블로그의 글을 엮어 요리책을 낸 김인미(44)씨가 결혼 2년차인 김현혜(31)씨와 이제 겨우 결혼 두 달이 된 배옥례(31)씨에게 요리법을 알려줬다. 김치찌개와 매운탕을 맛있게 끓이는 비법 같은 것들이다.
얼핏 보면 이제는 흔해진 ‘재능 기부’와 비슷했다. 하지만 정씨와 배씨는 ‘잘나가는’ 전문가가 아니라 노원구 이웃들이었다.
■ 경험·지식 나누는 ‘사람책’ 서울 노원구가 지난해 2월 시작한 사람도서관 사업은 지식과 경험을 나누려는 시민이 자신을 ‘사람책’으로 등록하면, 회원들이 등록된 사람을 1시간 동안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만남 주선’ 프로그램이다. 이런 만남을 책에 비유해 ‘대출’이라 부른다.
자동차를 잘 아는 정성우씨도 사람도서관 출범 때 자신을 사람책으로 등록했다. 이날이 두번째 대출이다. 정씨는 “동네 주민들끼리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김인미씨는 “대출을 원하는 분들께 요리, 블로그, 사회관계망서비스, 스마트폰 활용법을 알려드린다. 지난달엔 스마트폰을 구입한 할머니에게 사용법을 알려드렸다. 할머니가 ‘새 세상을 만났다’며 기뻐했다”고 말했다.
최근엔 이곳이 지역구인 안철수 국회의원(무소속)도 사람책이 됐다. 안 의원처럼 찾는 이가 많으면 다른 곳에서 강연회를 연다. 지금까지 1048명이 사람도서관에서, 2524명이 강연회를 통해 사람책을 무료로 대출했다. 반찬 만들기 요령이나 청소년 심리상담에서부터 경제 컨설팅, 늦깎이 공무원 도전기를 들려주겠다는 이까지 350명이 사람책이 됐다. 양시모(51) 사람도서관 관장은 “80%가 지역주민인 노원구 사람책은 지역사회의 중요한 소통 도구”라고 말했다.
사람도서관은 도서관이란 틀로 이웃간 소통과 공유에 활용한 사례로, 2000년 덴마크에서 시작된 ‘살아있는 도서관’ 사업을 본뜬 것이다. 덴마크의 사회운동가 로니 아베르겔이 음악축제에서 제안한 것이 전세계로 확산됐다고 한다. 국내에선 2010년 국회도서관이 시작한 이래 공공도서관, 대안학교, 시민단체 등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려왔다. 노원구는 이를 상설화한 것이다.
■ 함께 먹는 ‘집밥’ 지난 19일 점심때 서울 은평구 녹번동 옛 국립보건원 자리에 들어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선 센터 활동가 고유선(23)씨의 제안으로 ‘집밥’ 모임이 열렸다. 참석자 8명은 식사비 3000원을 센터 어귀에 놓인 통에 넣고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서로 대부분 초면이고, 제안자가 불러모은 것도 아니다. 사회적경제센터 관계자들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이 많았다. 프리랜서 일을 하며 최근 협동조합에 관심이 생긴 박소현씨, 공공정책 홍보 업무에 종사하는 배난주씨, 강남의 노무관리 기업에 다니며 사회적 기업 창업을 고민하는 회사원 김아무개씨 등이 처음 만나 함께 밥을 먹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경제에 관심 있는 분들과 밥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제안을 접하고 스스로 찾아왔다.
이날 밥 자리는 사회적 기업인 집밥(zipbob.net)이 있어 가능했다. 제안자가 집밥의 누리집에 밥 자리의 성격과 메뉴 등을 제안하면, 동참하려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려 밥 자리가 성립된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애묘인들의 모임, 유기견 봉사활동을 같이 하자는 모임, 네팔 등 빈곤국 개발 현황을 나누고 싶다는 모임, 배드민턴을 같이 치고 클래식 공연을 함께 보자는 모임이 집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함께 먹는 밥을 매개로 관심사와 취미를 나누며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해간다. 박인 집밥 대표는 “지난해 10월 누리집을 열었을 때 일주일에 8~10건이었던 집밥 모임이 최근엔 한달 100건 정도로 늘었다. 단체나 기관에서 집밥을 통해 모임을 여는 일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 공유를 바탕으로 수익도 사회적 경제와 관련한 이날 모임의 메뉴는 집밥에서 재료를 준비한 비빔밥이었다. 원래는 모임 제안자가 원하는 메뉴와 분위기에 맞춰 적절한 음식점을 소개하고, 음식점으로부터 홍보비를 받는다. 최근엔 다른 사회적 기업에서 만든 음식을 배달해주고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이들을 연결해주면서 수익도 올리는 셈이다. 이렇게 모임 주선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서 돈을 번다.
집밥처럼 단순히 모임을 주선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여행 경험을 공유하려는 ‘플레이플래닛’(letsplayplanet.com), ‘마이리얼트립’(myrealtrip.com) 등은 누리집을 통해 현지 여행가이드로 나선 유학생 등과 여행객을 연결해준다. 유학생 등은 자신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어 좋고, 여행객은 저렴한 참가비로 궁금한 점을 안내받을 수 있다. 경험과 취미의 공유가 더욱 쉽고 체계적으로 이뤄지도록 도우면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노원구의 사람책은 경험과 취미의 공유가 지역 공동체를 강화하는 사례다.
조인동 서울시 서울혁신기획관은 “도시 생활에서 도로나 주차장 같은 공공재의 공유를 1차 공유로, 물건을 함께 쓰는 협력적 소비를 2차 공유로 본다면, 사람의 지식·경험·재능을 나누는 걸 3차 공유라 할 수 있다. 3차 공유는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더 큰 가치를 낳는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어떻게 해야 뿌리내릴까>
‘공유’ 권장하는 법·제도 마련이 1순위
공공·민간 소통 위한 시스템 필요
공유경제가 최근 2~3년 사이 국내에서도 빠르게 번지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공유경제가 뿌리내리는 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는 협력체제를 만드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를테면 내 집의 빈방을 이웃에게 개방하는 ‘숙박 공유’가 활성화하려면 도시민박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건물 전체면적이 230㎡ 미만일 때만 도시민박업을 허용하고 있으며,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은 입주자대표회의 등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재정적 지원도 절실하다. 공유경제 기업·단체들이 지속가능한 기반을 다질 때까지 사회적 협동조합처럼 중개 플랫폼 구축, 프로그램 개발 등에 필요한 초기 비용을 지원하고 부가가치세 등을 면제·감면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공유하는 공간·물품을 남이 훼손하거나 파손할 경우 이를 보상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우선 정비해야 할 지점으로 꼽힌다. 세계적 빈방 공유 서비스인 미국 에어비앤비가 집주인의 물품 등이 손상될 경우 최고 12억원까지 보상받는 보험에 가입한 것은 좋은 보기다.
자동차를 공유하는 카셰어링이 확산되고 있지만, 자가용 차량을 빌려주는 수준에는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카셰어링 회사가 렌터카 업체를 연결해주거나 직접 차량을 임대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 법률이 개인 영업을 불허하고 있는데다, 자가용 차량을 빌린 사람이 교통사고를 낼 경우 치료비 등을 보장하는 보험상품이 없는 탓이 크다.
부산발전연구원의 김형균 박사는 “공유경제 확산에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려면 공공과 민간이 소통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 공유촉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중인 혁신기업가센터 오이씨(oecenter.org) 대표 장영화 변호사는 “한국 공유경제 시장은 미국처럼 넓지 않은데다 초창기여서 수익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다. 민간기업의 자생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공공 부문이 지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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