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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6.26
조회수
4,700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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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신동아| 기사입력 2013-06-25 10:33
[신동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주택가.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이 애잔한 가야금 선율을 타고 골목길을 흐른다. 여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떨어지는 복사꽃처럼 흩어진다. 지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가락에 귀를 기울인다. 때론 어깨를 들썩이기도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듯 심심찮게 우리 가락을 제대로 듣는 호사를 누린다. 건물 4층에 있는 사단법인 가야금병창보존회 덕분이다.

가야금병창보존회를 이끄는 강정숙(61) 용인대 국악과 교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및 산조 보유자다. 1970~80년대 창극계의 프리마돈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판소리 명창’ ‘가야금산조 명인’ ‘가야금병창 명인’ 소리를 함께 듣는 우리 국악계의 독보적 존재다.

환갑을 넘겼지만 가야금 타는 자태는 여전히 고왔다. 명주실 가야금 줄을 누르는 왼손가락 끝엔 팽팽한 긴장이 흘렀고, 오른손가락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줄 위를 날아다녔다. 그의 스승 향사 박귀희가 “한 포기 고귀한 난처럼 곧은 듯 부드럽고 섬세한 음률의 소유자”라고 한 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는 “요즘은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지금 내게 배우는 제자들은 축복받은 것”이라며 웃었다.

사무실은 젊은 여성들로 붐볐다. 제자들이라고 했다. 국악 침체기라고 하지만 그의 음악을 전수받으려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제자들이 호리호리하고 미모가 뛰어났다. “외모로 제자를 뽑는 모양”이라고 하자 “아무래도 무대에 설 사람이기에 외모도 본다”고 했다. 보기에 아름다우면 연주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國唱을 만나다

국악과 인연이 닿은 것은 10대 시절이다.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님이 고향 경남 함양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이주했다. 예향(藝鄕) 남원은 우리 전통예술의 산실.

“광한루 근처에 살았는데, 스피커에서 하루 종일 판소리 ‘춘향가’ 가락이 나왔어요. 아버지가 임방울 선생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국악과 인연이 많았는데, 언니(강문숙)에겐 판소리, 저한테는 한국무용을 배우게 하셨죠.”

언니가 남원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어린 강정숙은 문밖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혔다. 그의 소리를 들은 남원국악원 김영운과 강도근이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권했다.

어렸어도 열정은 대단했다. 판소리를 배우는 한편으로 강순금에게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를 익히는가 하면, 원광호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우기 위해 광주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텔레비전에서 가야금산조의 대가 공철 서달종의 연주를 듣고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냥 좋았어요. 뭐든지 한번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정도가 돼야 그만두는 성격이에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느 날 ‘내 소리’가 귀에 들리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너는 절대 국악을 그만두지 말라’ ‘넌 대성할 것’이라며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것도 큰 힘이 됐죠.”

그의 인생을 바꿀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974년 문공부 주최 제1회 전국판소리 명인명창대회가 남원에서 열렸다. 전국의 소리꾼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그는 3등을 차지했다. 1등은 그보다 13세 위인 조상현 명창이었다. ‘국창(國唱)’으로 일컬어지는 만정 김소희가 심사위원으로 그를 지켜봤다. 어리지만 소리의 위아랫목을 다 갖추고 있음을 알아본 김소희는 그를 서울로 데려가 자기 집 아랫방을 내 줬다. 제자로 삼은 것이다.

서울에서 그는 온종일 뛰어다니며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박귀희에게 가야금병창을, 한영숙과 이매방에게 춤을 배웠다. 공철 서달종에게선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하나같이 국악계의 거목들이었다. 이들의 강습소가 창덕궁 앞에서 단성사 사이 골목에 모여 있을 때라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들 어찌나 사랑해주시고 정성으로 가르치시는지 힘든 줄도 몰랐어요. 예인이 누리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 스승 복이라는데, 저는 인간문화재급 스승들의 향기를 듬뿍 쐴 수 있었으니 엄청난 행운아였죠.”

 

인간문화재급 스승들

▼ 김소희 선생이 다른 선생들에게 배우는 걸 반대하진 않았나요.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상태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오히려 각 분야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울 수 있도록 직접 스케줄을 짜주기도 하셨죠.”

▼ 그런 분들에게서 배우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다들 물질적으로 따지거나 바라지 않으셨어요. 이매방 선생님은 ‘판소리하는 제자는 처음’이라며 레슨비도 받지 않고 가르쳐주셨어요. 처음엔 어머니가 농사 지은 쌀을 보내오면 그걸로 성의 표시를 하다가, 제가 돈을 벌면서부터는 제 나름대로 성의껏 인사를 했죠.”

선생마다 각지에서 올라온 내로라하는 국악 신예들을 문하생으로 두고 있었다. 강정숙은 이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갔다. 뜯고, 튕기고, 긁고, 치고, 목이 갈라지도록 밤낮으로 소리를 질러대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1975년 MBC 국악유망주상, KBS 제2회 전국 명인명창경연대회 판소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그는 그해 12월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박동진, 박초월, 김소희 등 최고의 소리꾼들이 총집합한 곳이었다. 또 한층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입단 1년 만에 창극단의 ‘꽃’으로 올라섰다. 놀부전, 심청전, 춘향가, 수궁가 등 당시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하는 모든 창극의 주연은 그의 몫이었다. 방송국 등 외부에서 하는 창극에도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곤 했다. 판소리, 민요, 가야금 등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는 장르를 두루 잘하는 데다, 단아한 미모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국악 장르 중에서도 창극만큼 어려운 게 없다. 한 사람이 보통 4, 5인 역을 해야 한다. 창도 해야 하고, 악기도 연주해야 하고, 때론 춤도 추고, 연기도 해야 한다.

▼ 당시엔 창극의 인기가 대단했죠.

“공연마다 관객으로 꽉 찼으니까요. 요즘 국악이 인기가 없다고 하지만, 지금도 국립창극단 공연에는 관객이 많아요. 사람들이 국악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줄다보니 관심도 줄어든 거예요. 대관(貸館)을 하려면 2년 전에 예약해야 해요. 무대가 많이 늘어야 합니다.”

▼ 소리, 연주, 춤은 그렇다 쳐도 연기는 배운 적이 없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가 남보다 공부를 하나 더했는데, 바로 ‘말 공부’예요. 경상도 출신인 제가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 대사는 서울말로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녹음기 틀어놓고 발음연습을 혹독하게 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울컥해요(웃음). 속상하고 힘들 때는 풀릴 때까지 노래를 하거나 장구를 두드렸죠.”

잘나가던 1978년, 갑자기 창극단을 그만뒀다.

“어느 날 갑자기 외부 활동을 금지했어요. 창극단 무대에만 전념하라는 것인데, 제 생각은 달랐어요. 기량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방송을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어 사표를 냈어요. 그때까지 좋은 공연도 많이 봤고 창극에서 뮤지컬까지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서 사표를 내면서도 아쉬운 건 없었어요.”

젊은 주인공이 필요했던 창극단은 처음엔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창극단을 나온 뒤에도 1980년대 초까지 각종 창극 공연에서 주인공으로 활동했다.

 

박귀희 門下로

 

 

 

박귀희(가운데) 선생과 안숙선(왼쪽), 강정숙이 가야금병창을 하고 있다.

 

“만정 선생님은 저를 늘 ‘꼬맹이’라고 부르며 딸처럼 대해주셨어요. 선생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죠. 제게 마음의 의지를 많이 하셨죠. 공연하러 집을 나섰다가 바로 되돌아와서 저를 꼭 안아주고 다시 나가곤 하셨어요. 제가 지방 공연을 갈 때면 밤을 삶아 꿀과 섞어 경단을 만들어주시곤 했죠.”

당시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삼성, SK 등 대기업에서 국악 공연을 열어주곤 했는데, 김소희는 다른 제자들 모르게 그를 데려가 무대에 세운 때가 많았다. 그런 공연에서 받은 출연료가 창극단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 그만큼 아끼는 제자였으니 후계자로 삼으려 했겠군요.

“어느 날 제게 전수자 지정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에게는 저 말고도 신영희 언니, 김동애 언니 등 실력 있는 제자가 많았어요. 특히 동애 언니는 객지 생활을 하는 제게 친언니 이상으로 잘해줬죠. 그런 언니가 절 부르더니 ‘너는 가야금병창도 잘하니까 향사(박귀희) 선생에게 가면 안 되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가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서. 전수자가 되지 못하면 자기는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20대였던 제가 전수자가 뭔지, 스승을 옮기는 게 뭔지 알았겠어요. 그저 가장 친한 언니와 헤어지는 게 싫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 김소희 선생에게 뭐라고 말했나요.

“그냥 ‘판소리가 힘들어 가야금병창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크게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에요. 사람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뺨을 맞고, 정든 아랫방을 떠나야 했죠. 얼마 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셨는데, ‘철새’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아마 그때 전수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판소리만 했겠죠. 거기서 운명이 바뀐 거죠.”

▼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동애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작았던 거네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저 좋아하는 언니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많이 의지했거든요. 제가 선생님을 옮긴다고 해서 판소리를 아주 안하는 것도 아니니까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한 거죠. 나중에 선생님이 큰 상처를 받으셨다는 걸 알고 많이 괴로웠어요.”

▼ 그때 김소희 선생에게 완전히 내침을 당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공연도 같이 했고, 명절이나 생신 때마다 찾아뵙곤 했어요.”

▼ 나중에라도 해명할 생각은 안 했나요.

“사실을 이야기하면 동애 언니가 난처해지잖아요. 나도, 동애 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신영희 언니도 입을 다물었죠. 나중에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병원을 찾아가 말씀드리고 오해를 풀었어요.”

 

 

 

 

김소희는 유독 제자 복이 박한 예인이었던 것 같다. 자태, 목소리까지 자신을 닮아 어릴 때부터 수양딸 삼아 애지중지 기른 김소연은 기대를 등지고 국악계를 떠났다. 대신 빈 가슴을 채워주던 강정숙은 김동애와의 의리 때문에 가야금병창으로 갔다. 그런데 김동애마저 30대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 앞서 또 다른 애제자 안항연도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다. 비밀리에 키우던 마지막 애제자 오정해는 영화 ‘서편제’ 바람을 타고 영화판으로 떠났다. 신영희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안숙선과의 인연

▼ 박귀희 선생으로서도 김소희 선생이 절친한 언니였으니 곤란했겠어요.

“네, 어느 날 제게 ‘숙아, 형님이 너 때문에 내게 생꼬롬하시다’ 그러시더라고요(웃음).”

▼ 김소희 선생이 워낙 총애했으니 박귀희 선생으로서도 ‘내 제자’로 끌어안기가 쉽지 않았겠어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향사 선생님도 저를 오랫동안 가르치신 스승이시니까요. 안숙선 언니도 원래 만정 선생 아래 있었어요. 그러다 1973년 어느 날 향사 선생님께서 보시고는 욕심을 내 ‘저 녀석 나 다오’ 하니까 만정 선생께서 ‘욕심나면 데려가 공부 좀 원 없이 시켜라’ 하면서 흔쾌히 수락해서 제자로 삼으셨죠.”

이런 게 운명인가보다. 당대 국악계의 최고봉 만정 김소희와 향사 박귀희, 그 뒤를 이어 쌍벽을 이룬 안숙선과 강정숙의 인연은 이렇게 얽히고설켜 이어졌다.

두 사람이 걸어온 국악 인생은 닮았으면서도 묘하게 엇갈렸다. 둘 다 남원국악원에서 처음 국악에 입문했다. 안숙선은 스스로 김소희를 찾아가 제자가 됐고, 강정숙은 김소희가 발탁해 제자가 됐다. 이유는 달랐지만 둘 다 김소희를 떠나 박귀희 문하생으로 적을 옮겼다. 또한 나이 차이만큼 3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보유자가 됐다. 그러면서도 함께 활동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강정숙이 창극과 판소리를 할 때는 안숙선이 가야금병창에 집중했고, 강정숙이 가야금병창과 가야금산조에 집중할 때는 안숙선이 창극과 판소리에 매진했다.

▼ 안숙선 선생에 대한 경쟁심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같은 선생님께 배워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른 법이니까.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기에 보고 듣는 사람이 평가하는 거지, 본인들이 아웅다웅할 게 없죠. 숙선 언니가 TV에 나오는 거 보면 반갑게 잘 보고 그랬어요.”

▼ 두 분 사이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이런 일이 있어요. 향사 선생님이 제게 전수자 지정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때 가야금산조에 심취해 있어서 서류를 계속 안 드렸어요. 그러니까 숙선 언니가 ‘선생님 속 썩이지 말고 빨리 가져다드리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판소리 때문에 전수자 지정받는 걸 미뤄 선생님을 속상하게 했는데 너까지 그러면 선생님이 무척 실망하실 거라면서요.”

 

쉽고도 어려운 가야금병창

가야금병창은 직접 가야금을 타며 노래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쉽고도 어렵다. 소리가 받쳐주기 때문에 가야금산조만큼 어렵지 않다. 소리 역시 판소리의 재미있는 대목이나 눈대목을 부르는 것이어서 판소리 완창만큼 힘들지 않다. 게다가 가야금 반주가 힘든 목을 쉬게 하고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판소리 독창자만큼 소리에 능해야 하며, 가야금을 안 보고도 헛손질을 안 할 만큼 악기를 잘 다뤄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완벽해야 듣는 맛이 난다. 제대로 된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의 청청한 가락과 판소리의 무거움이 어우러져 내뿜는 천연탄산수 같은 묘미가 있다고들 한다. 여기에 더해 가야금병창은 재색도 겸비해야 한다. 국악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유다.

가야금병창자들의 연주는 아무래도 전문 소리꾼이나 ‘가야금잽이’가 보면 어느 한쪽이 부족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강정숙은 전혀 기우뚱거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1985년엔 전주대사습 가야금병창 장원을, 1986년엔 신라문화제 기악부문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7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다.

“처음엔 국립창극단에서 다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향사 선생님이 ‘창극단엔 안숙선이 있으니까 넌 국립국악원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선생님 욕심에 둘을 같은 데 둘 필요가 없다고 여기신 거죠.”

그는 “내가 국립창극단에 있을 때 언니는 밖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였다. 내가 사표를 내고 나온 후인 1979년에 언니가 국립창극단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쪽에선 내가 선배”라며 웃었다.

 

 

 

강정숙 교수의 50년 국악인생을 보여주는 상장과 포스터들.

 

 

 

 

국립국악원 시절, 해외공연을 참 많이 다녔다는 그는 특히 유럽 공연이 즐거웠다고 한다.

“유럽에만 가면 절로 신이 났어요. 내 신풀이 하러 가는 기분이었죠. 유럽의 콘서트홀은 천장이 공명통처럼 돼 있어요. 천장, 마루, 무대가 전부 통나무로 돼 있고, 음을 막는 커튼이나 카펫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울림이 아주 좋죠. 가야금, 거문고, 대금 소리도 예민하게 받아서 되울려줍니다. 우리나라엔 지금도 그런 공연장이 없어요.”

 

향사 선생의 옥반지

강정숙은 1990년 전수조교로 지정되고 1992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는 등 박귀희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탄탄히 다져갔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음악 욕심에 몸을 혹사한 탓인지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의사가 목에 물혹이 생겼다며 수술을 권했다. 비슷한 수술을 한 선배가 목소리가 달라져 음악을 포기한 경우를 봤던지라 수술을 거부했다. 의사는 “앞으로 노래를 부르지 마라”고 경고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운동을 하고 음식 양을 늘려 체력을 키웠다. 관리를 잘해 목은 좋아졌지만, 그 후에도 여기저기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들락거렸다. 병원 가기가 귀찮아 진통제를 먹으면서 행사를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의사는 “10분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1993년에 향사 선생이 돌아가시고, 1995년엔 만정 선생이 돌아가셨어요. 몸이 몹시 아프던 때에 두 스승을 잇따라 잃어 마음까지 힘들었어요. 박귀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마지막 화장을 제가 직접 해드렸죠. 그때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차가운지 처음 알았어요.”

그의 손가락에 고운 빛깔의 옥반지가 끼워져 있다. 박귀희가 평생 끼던 반지다.

“선생님이 편찮으셨을 때 아무에게도 병명을 알리지 않았어요. 저는 수시로 병원을 다닐 때라 암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해외공연을 갔다 오면서 암에 좋다는 건강식품을 사다드렸죠. 그날은 아무 표정이 없으시더니, 다음 날 불러서는 당신이 차고 다니시던 목걸이, 반지 세트와 함께 이 옥반지를 주시더군요. 지금도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꼭 이걸 껴요.”

▼ 어떤 스승이었습니까.

“하나를 가르칠 때마다 완벽하게 할 때까지 반복하셨어요. 오죽했으면 제가 ‘축음기’란 별명을 붙여드렸다니까요. ‘노래에 감정을 실으라’는데, 그게 금방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 구절을 며칠씩 반복하다보면 저만 애가 터져 죽죠.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셨어요. 선생님과는 산에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절에도 가고 친한 분의 과수원에도 가고 그랬는데, 한번 가면 한 달 넘게 하루 18시간 이상 가야금을 타고 소리를 한 적도 있어요. 나중엔 손가락 끝이 다 갈라져 터지고 목소리도 안 나와요. 그 정도로 엄하고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셨죠.”

그에겐 또 한 사람의 영원한 스승이 있다. 가야금산조의 대가 공철 서달종이다. 19세 때 흑백 텔레비전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 무작정 서울로 찾아가 배우기 시작했으니 만정이나 향사보다 앞선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공철의 가야금산조는 즉흥성이 강해 가야금을 웬만큼 하는 사람들도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했다.

 

 

 

가야금병창보존회에서 강정숙 교수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처음 찾아뵈었을 때 제가 가야금을 만지는 걸 보시더니 음색이 예쁘다고 하시더군요. 풋풋한 옥양목 두루마기, 하얀 버선코, 유난스레 작은 손발, 인자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씀이 정말 선비의 모습 그것이었어요. 처음엔 가야금 타는 수법(手法)을, 다음엔 장단을, 그다음엔 강약을 가르쳐주셨죠. 다른 선생님들에게 배운 후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창덕궁 낙선재 뒤에 있는 선생님 댁이었어요. 집에 들어설 땐 땀투성이였죠. 그럴 때면 선생님은 손수 놋대야에 바가지 물을 부어주시고 풋고추와 된장에 보리밥으로 밥상을 차려주시곤 했어요.”

▼ 가르침은 어땠나요.

“양철지붕 집이라 여름이면 방 안이 찜통이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진양조를 타는데 선생님이 손으로 장단을 잡아주시며 조용히 말씀하시는 거예요. ‘얌잔이(강정숙을 부르던 애칭), 지금 밖에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어요’라고. 속으론 ‘더워 죽겠는데 무슨 함박눈이야?’ 싶었죠. 선생님은 한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상상을 하면서 그 느낌을 실어 연주하라는 거예요. 중모리엔 봄이 오고, 중중몰이엔 군자(님)가 찾아오고, 자진모리엔 희로애락이 담기고, 휘모리로 넘어가면 ‘청춘이 다 가버린다’고 하셨어요. 마지막 뒤풀이를 타면 ‘인생이 마무리된다’고 하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단이 넘어갈 때마다 일일이 감정을 담아주셨죠.”

 

 

 

 

▼ 다른 제자들은 없었나요.

“제자가 많았는데,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관두고 시집가고 외국 나가고 그랬대요. 지금 활동하는 다른 제자는 없어요.”

▼ 1982년에 작고하셨으니, 강 선생께서 마지막 제자인 셈이군요.

“그만큼 애정을 많이 주셨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선생님 팬이었어요. 그래서 삼성그룹에 외국 손님이 오면 선생님을 초청해 공연을 하곤 했어요. 선생님 악기를 들고 따라가기도 했죠.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어요. 아, 선생님이 쓰시던 가야금을 이인희 고문이 갖고 계신 걸로 알아요. 개인이 보관하는 것보다는 우리 연구소에서 보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꼭 한 번 만나뵙고 기증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서공철은 허명에 연연하지 않은 예인이었다. 그를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보유자로 지정하기 위한 심사가 있던 날도 친한 벗의 공연에 찬조출연이 더 중요하다며 심사장이 아닌 공연장으로 갔을 정도다. 이렇듯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스승과 판소리, 가야금병창은 물론 가야금산조까지 정복하려는 욕심꾸러기 제자. 어쩌면 두 사람의 이런 뚝심이 서공철의 가야금산조 바디(명창이 판소리 한 마당을 절묘하게 다듬어놓은 소리)에 맞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정숙은 1990년 호암아트홀에서 국악계 최초로 가야금산조 및 병창 발표회를 열어 국악계에 화제를 일으켰다. 또한 서공철의 생전 연주를 모아 앨범도 만들고, 악보를 펴내는 등 스승의 음악을 보존, 전수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국악평론가인 노동은 중앙대 교수는 강정숙의 가야금산조에 대해 “노래도 하지 않았는데 늘 소리가 들려온다. 삶의 노랫소리가. 꽃이 피면 이내 지고 달이 차면 마침내 기울고 잎 또한 무성하다가 이윽고 시드는 우리네 삶의 영혼을 그는 언제나 불러내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영혼 그 자체인가보다”고 평했다.

 

김재규의 安家 초대

그가 활동하던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는 철권통치 시절이었다. 밤이면 권력자들이 ‘안가(安家)’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 탤런트와 가수들이 술자리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려가던 시절, 젊은 국악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흘이 멀다 하고 불려 가기도 했죠. 당시 영부인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보곤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도 연주를 했죠.”

▼ 안가에 불려간 적도 있나요.

“만정 선생님이 그런 자리는 잘 막아주셨어요. 저희에게 늘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지 말라고 당부하셨죠.”

“그래도 권력층의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하자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부하였던 모 대령이 몇 번 찾아왔어요. 1979년 어느 날인가는 다방으로 저를 부르더니, 무조건 10월 28일에 와서 연주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그러겠다고 했는데, 이틀 전인 10월 26일에 그 사건이 일어난 거죠.”

그러면서 그는 세인이 가진 ‘국악에 대한 편견’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야금을 탄다고 하면 아직도 ‘기생’이라며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마디로 무식한 소리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편견이에요. 일제가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고 만들어낸 거죠. 선비가 거문고 타면서 시조를 읊는 등 양반이 아니면 음악을 접하지 못했잖아요. 궁중악사가 따로 있었고, 판소리하는 사람도 벼슬을 받았어요. 황진이, 매창 같은 분들도 예기를 하는 기생이지 술 따르는 기생이 아니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예술 단원인 거죠. 옛날엔 정식으로 예기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어요.”

 

소리극 ‘황진이’

 

 

 

창극 ‘춘향가’에서 춘향을 열연하고 있는 강정숙.

 

가야금병창보존회는 5월 11, 12일 전남 구례에서 가야금 경연대회를 열었다. 2003년부터 강 교수가 자비를 털어 해마다 열고 있다. 초중고등부와 일반부, 신인부로 나눠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가야금창작까지 전 부문에서 경연이 열린다. 그동안 서울에서 열리다 올해는 서공철의 고향인 구례에서 열렸다. 서공철 추모공연도 함께 펼쳐졌다.

▼ 다른 국악 경연대회와 달리 가야금 창작 부문도 있더군요.

“창작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게 과거 음악을 잘 연주하는 것만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 만들어진 곡 중에도 가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는 곡들이 있어요.”

▼ 퓨전 국악은 어떻게 봅니까.

“국악기를 사용한다고 다 퓨전 국악은 아니지요. 우리 음악을 제대로 소화하고,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시도는 좋다고 봐요.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국악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나 듣던 낡은 음악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젊고 예쁜 사람들이 하면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걸 기회로 전통 국악의 진수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좋은 거죠.”

 

 

 

 

▼ 향음제도 열고 있더군요.

“향사 선생님의 음악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죠. 선생님을 기리고 재조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해마다 하고 있어요. 우리 국악 무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는 설 곳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많지 않아요. 향사 선생님의 가야금병창을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이기도 하죠.”

▼ 안숙선 명창도 지난해부터 박귀희 선생의 고향인 경북 칠곡에서 향사 가야금병창 전국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저도 거기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어요. 국악 행사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죠.”

강 교수는 2009년 국립국악원 예술감독 시절 소리극 ‘황진이’를 만들었다. 대형 뮤지컬 못지않은 스케일과 무대연출로 국내는 물론 해외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가야금 전수관 건립이 꿈

그는 원래 소리꾼이다. 소리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다시 무대에서 판소리를 부를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 나이가 몇인데요. 욕심을 버려야죠. 가끔 모임 같은 자리에서 한 소절씩 뽑는 것으로 만족하죠”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의 머릿속에 무대에 올라 청중을 울리고 웃기며 신명나게 소리를 하던 20대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후학을 가르치는 즐거움이 크겠어요.

“스승의 음악을 전수하는 게 제자 된 사람의 가장 큰 도리이니까요. 전문적으로 배우는 전수자, 이수자, 전수조교 외에 용인대, 이화여대 학생들도 가르치고, 세종시에서 학점은행제를 통해 가야금을 가르치고 있어요.”

▼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장 강조합니까.

“제 신조가 ‘예술가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해준다’예요. 99번 연습한 사람과 100번 연습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예술이란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스스로 고독한 가마에 가두고 담금질한 끝에 얻은 열매라고 생각해요. 인생도 100%, 연습도 100%, 열심히 노력하라고 늘 이야기하죠.”

▼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소외된 층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호스피스를 위한 자선공연도 열 계획이에요. 제 연주와 노래에 사람들이 위안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그리고 세종시에 제 소유의 땅이 있는데, 그걸 기증해서라도 정부 지원을 받아 거기에 가야금 전수관을 만들려고 해요.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에요.”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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