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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수려한 물길, 정갈한 山間 적벽강의 신록(우송대 최학교수님)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6.26
조회수
4,417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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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수려한 물길, 정갈한 山間 적벽강의 신록

신동아| 기사입력 2013-06-25 10:33 기사원문
[신동아]
 

 

꽃이 아름다고 단풍이 곱다 하지만 봄날 아침의 햇살을 머금은 채 가늘게 떠는 새순만큼 어여쁠 수 있을까.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연둣빛 혹은 살색을 두른 그 여린 이파리들이 함박웃음처럼 떼를 지어 햇살과 어우러지는 그 봄날의 장관이야말로 생명의 경이, 탄생의 환희 그 자체다. 이러한 신록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강이 소리 내어 흐를 줄 알며, 새와 벌, 나비들이 노래를 하고 날갯짓을 할 줄 안다.

세상 어느 곳의 신록이 눈부시지 않을까마는 호젓한 강가에서 마주하는 신록처럼 정갈하고 경쾌하며 그윽하고 화사한 것은 없을 듯싶다.

금강(錦江)은 ‘비단 강’이란 이름처럼 곱고 부드러우며 또한 화려하다. 전라북도 장수 땅에 있는 뜬봉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용담호에 담겼다가 무주, 금산, 영동을 거쳐 대전 외곽의 대청호로 들어간다. 이 물은 다시 공주 부여를 지나 군산 서천 앞바다로 들면서 기나긴 여정을 마친다. 이렇듯 숱한 산기슭을 돌고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곳곳에 별난 경치를 꾸미는데, 강은 특히 상류 쪽인 금산 영동 땅에서 톡톡히 제 이름값을 한다.

 

기지개 켜는 新生의 숲

 

옛사람들의 호사심리는 곧잘 중국 대륙의 지명까지 이 땅에 옮겨오곤 했는데, 금강의 한 풍경을 일컫는 ‘적벽강’도 마찬가지다. 규모는 말할 것 없고 생김새마저 전혀 이질적인데도 양쯔강에 있는 그 이름을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를 흐르는 금강에도 붙여놓은 것이다. 괜찮다. 괜스레 제갈공명이며 소동파를 떠올리지 않고 붉은빛 도는 강가의 절벽만 볼라치면 능히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금산 인삼시장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부리면 소재지에 닿는다. 여기서 적벽강은 차로 20여 분 거리밖에 되질 않는다. 강줄기를 따라가면서도 놀라운 경치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강 따라 산봉들이 이어지고 곳곳에 그들이 빚어 놓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위 벼랑들이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숲과 돌밭들이 적당히 어우러지는 그 낯익은 풍경이 이곳에도 그대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우람, 거대, 기묘’와 동떨어진 이 ‘낯익음’…. 차라리 나 같은 이에겐 이것이 놀랍다. 잊었던 고향을 되찾은 듯한 느낌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겠는가. 정경(情景)은 모든 기이한 경치를 능가한다.

정겹고 푸근한 풍광 속에서는 제 자신마저 경치의 일부가 돼봐야 할 일이다. 자갈밭을 지나 강으로 다가가는 동안엔 자그락자그락 돌멩이 밟히고 부딪치는 소리가 상쾌하다. 바위 벼랑 위에는 신록과 진달래꽃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모습은 강의 수면에도 그대로 거꾸러져 있다. 피라미떼가 옮겨 다니는 강물은 맑고 따스하다. 강을 등지고 서면 신록과 산벚꽃이 색색으로 다투는 앞산이 다가든다. 길가에 도열한 버드나무 실가지가 흔들리는 모습까지 한눈에 잡힌다. 이 고요와 화평 속에서는 문득 온 세상이 눈부시다.

 

적벽 아래 오가는 이 없다

질펀한 뻐꾹새 울음 사이

참매미 소리 따갑게 쏟아지는데

홀로 말을 잃은 강

 


가끔 바람에 수런대던

미루나무 이파리

강렬하게 햇살 꽂히면

가느다란 입술에 경련이 인다

 


그 파장 밀려간 강에

누군가 남긴 발자취

물살로 씻기고 있다

 


땡볕에 주저앉은 산

말없이 휘감는 한 줄기 강물에

다시 맥박이 뛴다

그때 몸속에 갇혀 있다

기지개로 깨어나는 신생의 숲

- 김완하 시 ‘적벽강에서’ 전문

 

 

 

 

시는 비록 늦봄 한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고요와 함께하는 빛나는 풍광이 주는 그 강렬한 인상은 신록의 봄날은 물론 낙엽지고 눈발 날리는 때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소리는 뻐꾹새, 참매미한테 내주고 홀로 고요히 흐르지만 맥박이 뛰는 강은 더 큰 생명성을 지닌다. 하여 숲과 들판도 강에서부터 기지개를 켜며 새롭게 태어남을 적벽강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인삼어죽, 도리뱅뱅이

 

 

 

도리뱅뱅이.

 

강을 좀 더 거슬러 올라 수통교를 건너고 둔덕을 넘으면 작은 강가 마을을 만난다. 마을 앞에 걸쳐 있는 적벽교를 건너갈 수 있지만 길은 그쯤에서 끝난다. 끊어진 길 앞을 가파른 산협이 막고 있는데 그곳 산비탈도 온통 산벚꽃으로 환하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금산 인터체인지를 나온 뒤, 금산 읍내로 가는 대신 영동 방향으로 진행해 제원대교를 건너면 머잖아 ‘인삼어죽’으로 유명한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 닿을 수 있다.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고 강 너머에 깎아지른 절벽과 함께 부엉산이 우뚝 서 있는 경치 좋은 곳이다. 이곳 바위 절벽 또한 붉은색을 띠고 있는 까닭에 이곳을 금산 적벽강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곳은 적벽강보다 훨씬 하류 쪽이다.

금산에는 인삼을 경작하는 농가가 많아 옛날부터 일반 가정에서도 인삼을 곁들여 요리를 해먹던 풍속이 전해지는데, 오늘날 금산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소문난 인삼어죽도 그중 하나다. 특히 천내리에서는 풍부한 어족자원 덕으로 오래전부터 물고기에다 인삼을 넣고 죽을 쑤어 별미로 먹어왔다. 10여 년 전만 해도 입소문만 탔던 천내리의 인삼어죽이 이후 여러 차례 방송을 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고 오늘날에는 인삼어죽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인삼어죽은 예부터 몸이 허약한 사람들이 만들어 먹던 보양식이다. 금강 상류의 맑은 물에서 잡은 쏘가리, 메기, 붕어, 빠가사리 등에 인삼을 넣고 푹 곤 뒤에 수제비, 국수 등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 어죽은 영양가도 높지만 맛 또한 일품이어서 인기가 높았다. 조리법은 식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물고기를 뼈째 우려낸 국물로 죽을 쑤는 점은 대동소이하다. 민물고기를 중불에서 푹 곤 다음,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면 체에 걸러 가시를 발라내고 그 국물에 장을 풀어 간을 하며 이어 쌀을 넣어 쑨 다음 애호박, 깻잎, 미나리, 풋고추 등과 인삼을 썰어 넣어 한소끔 더 끓이면 인삼어죽이 된다.

 

사람과 함께한 자연

인삼어죽과 함께 도리뱅뱅이 또한 이곳 천내리의 대표 음식으로 손꼽힌다. 피라미와 같은 작은 물고기를 프라이팬에 빙 두르고 강한 불로 바삭해질 때까지 기름에 튀긴 뒤 양념을 해서 내놓는 도리뱅뱅이는 그 바삭바삭하는 식감이며 고소한 맛으로 인해 평소 민물고기를 꺼리던 사람들도 주저 없이 먹게 되는 별난 음식이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인삼은 물론 각종 약재가 즐비하게 진열돼 있는 금산 인삼시장은 그 자체만으로 좋은 구경거리다. 나그네들을 위한 먹을거리도 많은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인삼막걸리와 인삼튀김이다. 장거리 어디에서나 편하게 앉아 인삼을 안주로 인삼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세계인삼엑스포를 계기로 인삼시장 또한 깔끔하게 정비됐는데 반듯하게 뚫린 시장 거리를 걸으며 귀한 약재들을 구경하고 흥정이라도 몇 번 하다보면 두세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가슴을 동여매던 오랏줄

그 땡볕 속에서도

 


펑, 옥수수 한 줌으로

하얗게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내

한낮의 무료를 마른 장작처럼 쪼개며

장터를 뒤흔들던 그 사내

 


어디로 갔나,

- 김완하 시 ‘금산 장’ 전문

 

 


 

 

 

보석사 일주문.

 

그렇다. 엑스포까지 치른 금산 장에서는 이제 전통시장의 파수꾼 같던 그 뻥튀기 사내의 모습도 찾기 어렵다. 세상살이의 고단과 남루한 가난마저 폭음 하나로 뒤집어놓을 듯하던 그 사내들도 이제 그리움의 대상이 돼버렸다.

읍내를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곧 종합운동장을 만나고, 여기서 2km쯤 더 가면 보석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금산의 진산(鎭山)인 진락산(進樂山) 남쪽 기슭에 앉은 보석사. 맑고 고요한 주위 풍광처럼 절 이름조차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절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집들이 정겹고 일주문에서부터 천년 수령의 은행나무까지 이어진 전나무 숲길이 빼어나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저마다 천공을 향해 키를 세우고 선 모습이 시원스러우며 그 나무에서 떨어진 녹음은 상쾌하면서도 그윽하다.

숲길 초입에 영규대사의 의병승장비가 서 있어 행인의 발길을 끈다.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웠던 영규대사는 한때 보석사에서 수도를 한 적이 있으며, 절에는 그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숲길이 끝나는 자리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천년 수령을 자랑하는 이 거목은 신라 헌강왕 때 조구대사가 보석사를 창건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기이한 느낌마저 주는 큰 나무다. 은행나무에서 개울을 건너면 절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지만 곧장 산으로 들면 진락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된다. 보석사 절집은 대개 근래에 지은 것들이고 본래의 규모도 따르지 못한 것이어서 볼품이 떨어진다.

아름다운 산수의 금산 땅이다. 부리면 제원면에 수려한 금강의 물길이 있다고 한다면 진락산과 선야산, 백암산을 아우르는 남이면은 정갈하면서도 기품 있는 산간이다. 보석사에서 산 하나를 타넘어서 마주치는 635번 지방도의 아래 위쪽에서 만나는 그 산간 풍치는 자못 이곳이 충청도 내지라는 사실조차 잊게 한다.

특히 신록의 산야에 화려한 산벚꽃이 점점이 수를 놓는 봄철 한때와 들불처럼 단풍이 번지는 가을철에 이곳에 들면 아연 별천지에 몸을 띄운 듯한 황홀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 맑고 어여쁜 색채의 조화며 투명한 고요와 은은한 소리는 자못 필설로 그리기 어렵다. 강원도 산간 오지와 달리 이곳의 자연에는 사람이 함께 있어서 정겨움을 더한다. 태초부터 그러한 듯이 천연덕스레 자리한 농가들뿐만 아니라 밭일 하는 농부와 풀 뜯는 소들까지 여기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조건이 되어 구색을 맞추기 때문이다.

산간 마을을 지나쳐 굽이굽이 산길을 타오르면 이윽고 잘 닦인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배티재다. 사람의 내왕이 뜸한데도 공터 한쪽에는 정자며 간이 상점도 있다. 여기서 산으로 낸 층계를 오르면 큼직한 전승탑과 함께 비석들이 있는 잔디밭이 있다. 6·25전쟁 동족상잔의 참화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간조차 비켜가지 않았음을 일러주는 증표들이다. 해발 650m의 이곳 백암산은 산 중의 산으로 일컬어진다. 이 일대 산간 마을은 6·25전쟁 무렵 빨치산들에 의해 요새화한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빨치산들은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산벚꽃이 활짝 핀 백령성.

 

과거를 기억하는 산벚꽃

1951년 5월, 마침내 민관은 백암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했으며 이후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전투는 이듬해 6월에야 양쪽 모두에 숱한 사상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금산 육백고지전투다. 이 전투에서 2300명에 가까운 빨치산이 사살되고 1000여 명이 생포됐다. 300명에 가까운 군경, 민간인이 희생됐다고도 한다.

 

전승탑 뒤편의 등산로를 조금 오르면, 옛 성곽의 형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은 산봉우리를 만날 수 있다. 전망 좋은 곳에 성을 세우는 이치가 그렇듯이, 이곳 성터에서는 맞은편의 백암산 산줄기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배티재 이편저편의 골짜기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이 산성이 백제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백령성(栢嶺城)이다. 신록과 산벚꽃도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일까. 온 산이 연둣빛 신록이며 점점이 산벚꽃이지만 이 성터에서 마주하는 빛과 색이 유독 짙고 환하다.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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