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스토리] “콘텐츠 유료화? ‘제품’보다 ‘서비스’로 접근해야”
| 기사입력 2013-06-25 10:33
[신동아]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투자한 벤처 1호, ‘매출 제로’인 상황에서 30억 원 투자 유치…. ‘포도트리’는 2010년 7월 창업할 때부터 화제의 벤처로 주목받았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프리챌, NHN 등 1세대 인터넷 기업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진수(40) 대표의 이력도 시선을 끌었다.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스마트 혁명’을 한창 주도하던 당시 포도트리는 ‘가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단돈 0.99달러에 판다. 5년 내 10억 다운로드, 매출 1조 원을 올린다’는 글로벌 히트 앱 전략을 내세웠다. 곧 출시된 포도트리 앱들은 히트를 쳤다. 앱 하나로 하루에 1000만 원 이상 벌기도 했고, 앱스토어 유료앱 카테고리에서 단골로 1위에 올랐다. 게임이 아니라 도서, 영단어, 위인전 등 교육용 콘텐츠로 거둔 성적이기에 더욱 이례적인 일로 평가됐다.
하지만 현재 포도트리는 카카오의 모바일 콘텐츠 장터 ‘카카오페이지(KakaoPage)’의 파트너, 즉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서비스로 사업 전략을 확 바꿨다. 콘텐츠 앱을 통해 ‘유료 콘텐츠가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가 되는’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는 결국 실패한 걸까.
그런데 이렇게 바뀌었음에도 포도트리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줄지 않았다. 창업 3년이 채 안 된 지금까지 137억 원을 투자받았고, 70억 원 규모의 해외 투자를 앞두고 있다. 왜 시장은 여전히 포도트리를 주목할까.
‘아이폰 동창’들의 마라톤 대화
이진수 대표는 인터뷰 약속시각을 두 시간 뒤로 미루자고 했다. 김범수 의장(그는 포도트리 이사회 의장이기도 하다)을 만나면 으레 네댓 시간씩 얘기가 길어지기 때문이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김 의장에게서 투자를 받게 된 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 대표는 NHN에서 이 회사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김 의장과 인연을 맺었다.
▼ 김 의장이 ‘포도트리는 사람과 아이템, 자본의 결합이란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벤처 모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09년 11월 초에 김 의장과 함께 국내에 갓 들어온 아이폰을 샀어요. 그리고 두어 주 후에 둘이 만나 아이폰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는 ‘연락처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검색을 능가하는 킬러가 될 거다’라며 ‘카카오톡을 만들 것’이라고 했어요. 저는 ‘모바일에 맞는 콘텐츠 제작과, 그것이 모바일 플랫폼에서 직접 출판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너 정말 회사 그만둘 거니?’ 하고 물으면서 ‘사업안 좀 들어보자’고 했어요.”
둘의 대화는 10시간 넘게 이어졌다고 한다. 아침 10시에 만나 점심 먹고 헤어질 계획이었는데,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대화를 이어가다 저녁까지 같이 먹고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날의 결론은 이랬다.
“김 의장이 세 가지를 말했어요. ‘첫째, 새로운 사용자 경험과 산업적 변화가 시작될 것이란 생각에 공감한다. 둘째, 하지만 충분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 좀 더 연구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참여하거나 아니면 투자를 하겠다’라고요. 일단 카카오로 오라고 해서 6개월간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카카오톡 론칭을 도왔어요. 깊이 있게 포도트리 창업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창업 당시 포도트리의 모토는 ‘콘텐츠 리디자인’이었다. 누구나 좋아하고 원하는 콘텐츠를 모바일에 맞게 앱으로 다시 만든다는 것. 이를 0.99달러에 내놓아 전 세계인이 즐겨 사용하게 함으로써 앱 비즈니스를 창조한다는 것. 몇 가지는 포도트리의 장담대로 됐다. ‘슈퍼영단어 30,000’ ‘오키네루 영단어’ ‘세계인물학습만화 who’ 시리즈, ‘오즈의 마법사’ 등이 한국, 일본, 미국 등에서 대박을 냈다. 이 대표는 “유료 앱 전체 순위에서 4번, 카테고리별 순위에서 15번 1위를 했다”고 말했다.
▼ 글로벌 히트앱 전략은 접은 건가요.
“네. 2011년 말에 개별 앱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시장이 끝내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 왜죠?
“스마트폰 시장 환경이 정말 빨리 바뀌었거든요. 2010년만 해도 아이폰 점유율이 압도적이라 안드로이드용 앱 개발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하지만 곧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이 양강체제가 되더니, 지금은 북미 시장을 제외하고는 안드로이드폰이 대세가 됐죠. 이건 개발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예요. 또 킬러 앱의 라이프사이클이 너무 짧아졌어요. 처음 1위를 하면 이게 2주간 유지됐는데, 두 번째엔 1주일이더니 그다음은 사흘로 짧아지더라고요.”
▼ 돈은 벌었나요.
“남들보다 훨씬 많이 팔았는데도 BP(break-even point·손익분기점)를 못 넘겼어요. 앱스토어에서 콘텐츠 앱은 게임이나 유틸리티 앱과 경쟁할 수가 없어요. 게임회사는 게임 하나만 하면 되지만, 콘텐츠 회사는 앱이 여러 개라서 꾸준하게 업데이트하는 것도 어렵고요.”
포도트리는 2012년을 전후로 해 전략을 다시 짰다. 콘텐츠 리디자인을 앱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바일 콘텐츠의 제작과 마케팅 방식을 리디자인’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앱 사업을 해보니까 좋은 콘텐츠가 없어서 돈을 못 버는 게 아니더라고요. 비용 면에서 효율적으로 모바일 콘텐츠를 제작하고 마케팅할 수 있는 방법은 애플이나 구글도 제공하지 못했죠. 콘텐츠 앱 사업에 가장 공격적으로 나섰기에 이걸 빨리 배웠던 것 같습니다.”
카카오페이지는 ‘튜닝’ 중
▼ 그리고 나온 것이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서비스’ 모델이지요.
“킬러 앱이 아니라 킬러 플랫폼 서비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어요. 포도트리가 콘텐츠 플랫폼 서비스를 만들어 기반 기술 개발과 운영 서비스를 맡고, 트래픽 파워를 가진 초대형 사업자와 파트너십을 맺자는 전략을 세웠어요. 한국에선 카카오, 일본에선 야후재팬, 중국에선 텐센트 등과 손잡자는 생각입니다.”
2012년 2월 이 대표와 김 의장은 다시 만나 이번엔 5시간짜리 대화 대여섯 번을 통해 카카오페이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지난 4월 9일 서비스를 개시한 카카오페이지는 정의하자면 ‘모바일 콘텐츠 오픈마켓’이다. 콘텐츠 공급자(Contents Provider·이하 CP)가 카카오페이지에 올린 콘텐츠를 사용자가 내려받아 사용하는 구조다. 각 콘텐츠는 유료를 원칙으로 하되 일부는 무료로 제공할 수 있다. CP들은 포도트리가 개발한 ‘페이지에디터’로 콘텐츠를 제작하기 때문에 앱 개발비용이 따로 들지 않는다. 현재 카카오페이지에서는 허영만 화백이 ‘식객2’를 연재하는 등 만화, 소설, 요리, 스포츠 강좌, 학습, 육아 등 다종다양한 콘텐츠가 텍스트, 사진, 오디오, 비디오 등의 형태로 올라와 있다. 만화가, 소설가, 출판사 등 전문 CP 이외에 개인도 CP로 참여할 수 있다.
▼ 출시 한 달이 지났는데 반응이 좀….
“지난 한 달 동안의 성과가 시장이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는 카카오 공식 발표를 참고해주세요. 다만 쉽게, 적극적으로 쓰는 수백만 명의 사용자 집단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걸 그동안 파악했고 카카오와 함께 준비 중입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4개의 바퀴와 엔진 성능, 전자장치가 정확히 맞아들어가야 해요. 카카오페이지는 아직 튜닝이 끝나지 않았다고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 중간 평가를 한다면….
“경쟁력 있는 모바일 콘텐츠를 웹 기반의 저작도구로 저렴하게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카오 사용자들이 카카오페이지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서비스가 혁신적으로 쉬웠어야 했는데, 그 완성도까지는 아직 끌어올리지 못했어요. 열두 살 꼬마도, 50대 아주머니도 배우지 않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서비스 흐름이 직관적이거나 쉽지는 않아요. 뼈저리게 자성하는 부분입니다.”
유료화의 3대 조건
서울 강남구 역삼동 포도트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는 이진수 대표.
|
그의 책상엔 엑셀 시트로 목록이 빼곡하게 정리된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게 앞으로 두세 달 동안 개선할 과제들”이라고 했다.
▼ 카카오톡과의 연동이 없어 아쉽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직 없는 게 많아요(웃음). ‘미리보기’도 없고, ‘30일 이용권’ 같은 패키지 가격제도 사용자에겐 낯설지요. 사실 요란한 스타트가 더 위험하다고 보고 보수적으로 출발했어요. 서비스가 스스로 성장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마케팅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거든요. 지난 한 달은 무엇이 워킹하고, 무엇이 워킹하지 않는지 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서비스를 개선한 뒤 카카오의 소셜 장치를 포함한 본격적인 사용자 유입 마케팅을 할 겁니다.”
▼ 무료 콘텐츠 비율을 20% 이하로 제한했다가 최대 50%까지 허용하기로 했지요.
“그간의 데이터를 보니까 유·무료를 적절하게 섞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가격 전략은 저희의 정책 이전에 우리 CP들의 중요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최저가나 유·무료 비율 등 가격 정책의 최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 같이 학습하는 단계에 있고, 추가적인 변경도 가능한 상황이에요.”
▼ 인터넷이든 모바일이든 무료 콘텐츠가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콘텐츠 유료화가 정말 실현 가능하다고 보나요.
“전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봐요. 첫째, 콘텐츠가 모바일에 최적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틈틈이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2~3분간 들여다보고 끕니다. 호흡이 짧지요. 그래서 PC에서는 1시간짜리인 인터넷 강의도 모바일에서는 ‘3분 강의, 2분 문제풀기’ 식으로 바뀌어야 해요. 또 대용량은 스마트폰으로 내려받기 부담스럽죠. 둘째, 사용자가 쉽게 만나고 쉽게 소비할 수 있어야 해요. 이는 플랫폼의 문제죠. 그리고 셋째로, 이제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가 핵심이에요. 애니팡에서 보듯 상품이 아니라 서비스가 성공적이어야 해요. 이 세 가지가 만족될 때 유료화에 성공할 것이라고 봐요.”
▼ ‘콘텐츠 서비스’란 개념이 낯선데요.
“콘텐츠를 어떻게 패키징하고, 어떤 가격 정책을 쓰고, 사용자가 무얼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반영하고 개선하는 것이 서비스예요. 사용자들이 자주 방문하도록 매일 혹은 매주 업데이트해 새로운 가치를 더해야죠. 지금 안 팔려도 사용자들이 반복해서 들어온다면 희망이 있어요. 사용자가 뭘 원하는지, 왜 돈을 안 내는지 등을 잘 살펴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꿔줘야 해요. 그게 서비스예요. 단지 상품을 트래픽에 진열하는 콘텐츠 판매가 아니라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CP 중에서 성공 사례가 나올 것이라고 봐요.”
이쯤에서 카카오페이지를 마무리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1973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피앤지(P·G)를 잠시 거쳐 프리챌에서 기획팀장, 사업부장을 지냈고 NHN에서는 글로벌마케팅그룹장, 네이버마케팅센터장, 해외사업기획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서른 살에 통장 잔고 ‘0원’
▼ 잘 아시겠지만 돈 되는 건 콘텐츠가 아니라 게임이잖아요.
“음…. 어릴 때부터 책 편집에 불만이 많았어요. 중·고등학교 땐 교과서, 참고서가 마음에 안 들었고, 대학 땐 ‘교수님은 왜 자기 저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불평했죠. ‘서울대에 합격시켜주는 1권짜리 수학 책은 없나?’ 이런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 오리고 붙여서 책을 편집하곤 했어요.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것보다 영어 표현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더 쾌감을 느꼈어요. 엑셀 파일로 만든 이 데이터베이스 용량이 10메가바이트였어요. 오로지 텍스트만 가지고요. 콘텐츠 리디자인은 늘 머릿속에 있던 주제 의식이에요.”
▼ 대학 동기들은 주로 대기업이나 금융권으로 진출했을 텐데요.
“저는 장사하고 싶다,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죽 했어요. 아버지가 돈 쉽게 번다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금지했어요. 만약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더라면, 교재를 직접 만들어서 가르치고, 그걸 다른 데에도 팔아보려고 재학 중에 창업했을 것 같아요. 콘텐츠를 재가공하는 것이 엄청난 사업 기회가 될 거라고 어려서부터 죽 생각해왔거든요.”
군대에 다녀오고 4학년이 되자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는 국내 최초의 경영컨설팅 동아리인 ‘경영자문학생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남들도 자기처럼 사업할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은 회사에 취업하려는 열망이 매우 강렬하다는 걸 이 동아리에서 처음 알게 됐다. 그는 “취업에 필요한 지식과 스킬을 리디자인하는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사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마케팅 사관학교’로 불리는 P·G에 입사했다. 여성용 샴푸 ‘팬틴’을 맡았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1999년부터 인터넷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프리챌 초기 멤버로 합류했다”고 했다. 인터넷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프리챌에서 회사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는 바람에 2억 원을 ‘날렸다’. 전셋돈까지 들어간 전 재산이었다.
“서른 살에 통장잔고가 ‘0’이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하기 위해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준비하겠다고요. NHN은 지금 이렇게 사업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 인맥을 쌓는 기회였어요.”
▼ 프리챌, NHN, 카카오에서 각각 무엇을 배웠나요.
“프리챌은 벤처가 무엇인지, 왜 벤처를 하는지, 벤처의 가능성과 어려움, 위기, 실패에 대해 가르쳐줬어요. NHN에서는 성공한 벤처가 성공한 회사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 무엇인지, 지속적인 혁신과 노력을 경험했죠. 카카오는 새로운 모바일 시대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준 회사예요.”
▼ 전제완, 이해진, 김범수 등 인터넷 ‘거물’과 함께 일했네요. 이 세 분의 스타일을 설명하자면.
“정말 그렇네요(웃음). 각각에게서 배운 키워드가 있어요. 전제완 프리챌 사장에게선 도전이 어떤 열정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진 NHN 의장으로부터는 지속적인 혁신을 만들기 위해 경영자가 얼마나 깊이 있어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김범수 의장은 직관과 경청의 사업가예요. 그래서 그분에게선 늘 영감을 얻죠. 세 분의 공통점으로는 ‘남보다 먼저 한다’는 점이 있네요.”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못 한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창업팀’을 꾸려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현재 포도트리의 주축인 이진영 박종철 차상훈 이사 등이 그 멤버고, 이후 신종훈 CTO, 조광현 CFO, 박윤호 디자인 담당 이사, 하성철 크리에이티브아트 담당 이사 등이 주요 창업멤버로 합류했다. 웹상에서 콘텐츠 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불법복제 문제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말부터 아이폰과 함께 모바일 세상이 열렸다. 이 대표가 전화를 돌리자 모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고 한다.
▼ 직장 그만두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벤처는 불확실성이 크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에너지를 쏟아야 해요. 신뢰와 열정에 기반을 둔 팀이 아니면 같이 못 하죠. 아이폰을 2주 써보고 확신했어요. ‘이 기회에 못하면 우린 10년 전에 창업할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죠.”
▼ 김 의장이 흔쾌히 오케이한 이유가 뭘까요.
“콘텐츠를 리디자인하겠다는 사업적 비전을 키운 게 굉장히 오래전부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저희가 진짜 이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았고, 운명처럼 모바일이라는 좋은 환경이 열렸어요. 근데 아직 그 누구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그래서 우리 팀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본 것이 아닌가 해요.”
▼ 다른 투자자들도 비슷했나요.
“모바일에서 콘텐츠 시장이 바뀔 것이라고 본다는 점, 포도트리가 가장 준비된 팀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우리 투자자들의 공통점 같아요.”
▼ 현재 포도트리 지분 구성과 규모는 어떤가요.
“김 의장과 제가 40%, 직원들이 20%, 투자자가 40%예요. 70여 명의 직원이 개발·디자인·사업·경영관리 분야로 골고루 나눠져 있고요. 올해 말까지 개발자 10여 명을 충원할 예정입니다.”
사명(社名) 포도트리와 홈페이지 주소(www.podotree.com)는 2004년 일찌감치 결정해놓았다. 그는 당시 ‘애플’ ‘바나나리퍼블릭’ ‘레드망고’ 등 과일이 들어간 브랜드를 좋아했기에, 꼭 과일을 본떠 사명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입에 착 붙고, 영문 철자까지 쉬운 이름을 찾고 찾아낸 게 포도트리(podotree)다. 물론 포도나무란 뜻. 기독교 신자인 그는 “만들고 보니 포도는 예수를 상징한다”며 “내 이름보다 소중한 이름”이라고 했다. 그는 “2007년 전세 알아보러 갔던 집에 포도나무 아트월이 2개나 있는 걸 보고 아내에게 상의도 없이 사버렸다”며 웃었다. 그의 가족은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
▼ 포도트리만의 기업문화가 있나요.
“제가 대표로서 추구하는 가치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사도 직원도 최고의 프로로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이웃’이 되는 거예요. 업계와 사회 속에서 선한 이웃으로 평가받는 회사가 되고 싶어요. 물론 둘 다 겸비하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비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창립 3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이제 임직원 평가도 시작하려고 하는데, 기준은 두 가지예요. 헝그리 정신을 갖춘 최고의 프로인가, 선한 이웃인가.”
▼ 지·덕·체를 다 본다는 말이네요(웃음).
“정말 필수예요. 우리가 하는 일은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고도의 시너지가 필요하거든요. 제가 천재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CEO 혼자 천재여선 성공할 수 없어요. CEO가 먼저 프로여야 하고, 헝그리해야 하고, 선한 이웃으로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 해나가야죠.”
▼ 일과 생활의 균형은 맞추며 사나요.
“창업한 지 3년도 안 됐기에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죠. 대신 사회생활 폭을 많이 넓히지 않아요. 시간이 나면 가족을 돌보는 편이에요.”
그의 사무실에는 다소 엉뚱한 위치에 3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소파 코앞이 벽이다. “저건 앉는 용도냐, 눕는 용도냐”고 물었더니 “우리 CFO가 허리가 아파서 여기 와서 누워 쉬라고 놓은 것”이라며 “잠깐이라도 잠은 집에 가서 자는 편”이라고 했다.
▼ 아직은 신입 CEO지만, CEO가 갖춰야 할 자질이 뭐라고 느끼는지요.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봐요. 창업하고 CEO가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열정 생기고, 비전 생기고, 포기하지 않아요. 세상이 안 된다고 해도 ‘난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벤처 CEO예요. 그렇기 때문에 객관화하는 능력이 중요해요. 데이터 분석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서로 깊은 신뢰 관계가 있어야만 임직원들과 본질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요. 안 그러면 겉도는 얘기만 할 뿐이죠. 그러니 임직원들과의 신뢰도 중요하고 경청하는 자세, 솔직함도 중요하죠.
저는 김범수 의장이나 투자자들, 그리고 우리 임직원들한테 솔직해지려고 노력해요. 솔직하게 본질에 대해 얘기하면 도움을 얻어요. 서로 이해하게 되고 아이디어가 나와요. 작년에 투자자들에게 ‘앱 비즈니스 모델로 공격적인 경영을 했고, 우리가 틀렸다는 걸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어요.”
“팀이 이기길 원한다”
▼ 요즘 창업가 정신이 화두죠.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대기업이나 NHN과 같은 성공한 인터넷회사에서 일하는 인재들이 창업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업이란 사람과 아이템, 자본,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해요. 이걸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인재들은 이런 기업들에 많이 있죠. 젊은이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창업 열풍에 휘말려 사업에 나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사업은 리스크가 큽니다. 자기가 이 리스크를 지지 않는다고 창업을 부채질하는 건 말이 안 되죠.”
▼ 창업에 성공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제가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사업의 본질은 하나라는 거예요. ‘소비자가 돈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것은 계속 성장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에 답하는 것이 비즈니스입니다. 근데 이건 도전하지 않고는 판명이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도전하기 전에 ‘내가 남보다 속도 있게 할 수 있느냐’ ‘그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전문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답할 수 있어야 해요. 이게 있으면 사람이 들어오고 자본이 붙습니다.”
이 대표는 프로야구 팬이다. 매일 야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LG트윈스의 경기 상황을 확인하곤 한단다. 비가 오다 말다 하던 날, 3시간이 훌쩍 넘은 인터뷰가 끝나자 역시 LG 팬인 기자에게 “오늘은 결국 비 때문에 경기를 안 했네요”라고 알려줬다. 여담으로 ‘어떤 야구선수가 진정한 프로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평소에 프로야구 선수와 직장인을 비교해서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진짜 프로는 비(非)시즌에 최선을 다해요. 경기장에서 뛰기 전에 무지 열심히 훈련하고요. 또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진심으로 이기길 원해요. 자신이 잘하길 원하는 만큼 팀이 이기길 원해요. 팀이 이기는 데 관심 없다면 프로가 아니죠. 이승엽 선수는 항상 팀 얘기를 해요. 이게 진짜 프로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비즈니스도 그런 사람이 잘한다고 믿어요.”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