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소련이 가져간 보물 돌려달라” vs 푸틴 “나치에 희생된 군인들의 피 값”
| 기사입력 2013-06-27 11:36 | 최종수정 2013-06-27 14:21
러시아와 독일 간에 약탈문화재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2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박물관에서 열린 ‘청동시대:국경없는 유럽’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해 작심한 듯 “2차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에서 가져간 문화재들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독일도 터키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줘라”고 맞받아쳐 한때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dpa통신, 리아노보스티, 가디언 등이 전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가 문화재 전담부대를 만들어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약탈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비해, 소련군이 약탈한 독일 문화재는 국제적 이슈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45년 독일을 점령한 소련군은 회화, 조각, 귀금속 장신구, 고대 유물 등 약 20만 점의 예술품과 고서 약 200만 권을 약탈해 본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독일 동쪽 지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련은 양국의 우호관계를 다지는 차원에서 2차대전 때 약탈해온 문화재 약 150만 점을 돌려줬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국보급 문화재 수십만 점은 아직도 러시아 땅에 남아있다는 것이 독일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말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한 고대 그리스 트로이와 미케네 유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이름을 따 일명 ‘프리암의 보물’로 불리는 수백 점의 황금과 보석장신구들은 2차세계대전 이전까지 베를린 왕립박물관에 전시돼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베를린의 비밀지하벙커에 보관됐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당시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이 이 보물을 몽땅 러시아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했고, 실제로 그 중 일부가 1993년 모스크바 푸시킨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공개됐다.
같은 해 독일과 러시아는 ‘프리암의 보물’ 반환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지만, 7년 동안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나마도 2010년부터는 중단된 상태이다.
17세기 벨기에 거장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1610년작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도 두 나라 간에 치열한 신경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이다. 베를린 외곽의 상수시 성에 걸려있었던 이 작품은 1945년 사라졌다가 약 60년 뒤인 2003년 러시아에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5년 양국은 이 작품의 반환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지난해 말 드디어 러시아는 독일로 반환하는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림은 아직까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박물관에 걸려있다.
이밖에, 지난 2005년 푸시킨박물관이 ‘전쟁의 고고학:미지로부터의 복귀’전에서 선보인 고대 유럽유물 중 상당수가 소련군이 약탈해온 독일 문화재로 드러났다. 2007년 역시 푸시킨박물관에서 열린 유럽 중세유물전 출품작 중 메로빙거 왕조 유물도 전후 독일에서 실종된 것들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21일 에르미타주박물관 전시를 둘러보면서 “전시품 중 상당수가 소련군에 의해 약탈된 독일 유물”이라고 언급했다. ‘에버스발데 호드’로 불리는 이 유물들은 기원전 10∼11세기 독일 선사시대 황금유물로, 전쟁 중 행방이 묘연해져 소련군이 약탈해간 것으로 추정돼왔다.
독일과 러시아 간에 문화재 반환 협상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이다. 그동안 일부 약탈문화재들은 반환됐지만, ‘프리암의 보물’ 등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된 유물의 경우 여전히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독일 약탈 유물을 일종의 ‘승전 트로피’로 여기며 “나치에 희생된 군인들의 피 값”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독일 역시 전쟁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 2만 점을 아직도 원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치는 약 500만 점의 약탈 문화재와 귀중품을 광산, 수도원 지하실 등에 숨겨놓았던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 중 회화 및 조각품 46만6000점을 포함해 약 250만 점은 원소유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지난 2월 슈피겔은 독일 내에 남아있는 약탈문화재 2만 점 중 회화작품 2300점의 가치가 2004년 시세 기준으로 최소 6000만 유로에 이른다면서, 전후 역대 정부들이 히틀러 체제 청산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약탈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행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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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러시아 간에 반환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문화재들. 위부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프리암의 보물’, ‘에버스발데 호드’ . 문화일보 자료사진 |
5년 전 메르켈 정부가 ‘약탈문화재 연구조사 워킹그룹’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조사건수가 84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슈피겔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전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약탈문화재 8422점 중 93점을 원소유주에 돌려준 후 소유주 미상의 작품들은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 부쳐 1100만 달러 전액을 나치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다면서, 약탈문화재 조사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일부 소장품을 처분해 기금을 조성하는 ‘오스트리아 솔루션’을 적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애리 선임기자 aer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