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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희망으로 쏘아올린 그녀, 김해영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6.28
조회수
4,197
첨부파일
-
[Why] [김윤덕의 사람人] 눈물을 희망으로 쏘아올린 그녀, 김해영
조선일보| 기사입력 2012-03-11 04:29 | 최종수정 2012-03-11 17:36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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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비 내리는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중부기술교육원)에서 김해영씨를 만났다. 그녀가 서울에서 다닌 유일한 학교다. 굽이 10㎝나 되는 뭉툭한 신발을“세계를 누비는 나의 사륜구동”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아무리 험난한 곳이라도 달려갈 겁니다.” /이준헌 객원기자
척추장애→ 14살 식모살이→ 세계장애인기능 금메달→ 14년 아프리카 봉사→ 美컬럼비아대 석사

134㎝의 巨人


첫아이가 딸이라 화가 난 아버지는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졌다. 척추를 다친 갓난아기의 키는 더디 자랐다. 공부는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아버지의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기 위해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겨우 열네 살이었다.

'세상은 내게 좌절을 권했지만 나는 희망을 찾고 싶었다"고 김해영(47)은 말했다. '대학 가기 위해 공부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공부했다'는 그녀다.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배움에 목마른 소녀는 뭐든 악착같이 배웠다. 편물 기술로 전국기능대회를 휩쓸었다. 1985년에는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로 간 게 스물여섯 살 때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아무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며 꿈꾸게 하고 싶었다. 14년 동안 보츠와나 직업학교에 헌신한 그녀는, 미국 나약(Nyack)대학을 거쳐 2009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국제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한다. 주인집 창문 너머 교복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눈물이 솟았던 '열네 살 식모'는 이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됐다.

5일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중부기술교육원)에서 김해영을 만났다. 그녀가 처음 편물기술을 배운 학교다. 김해영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서울문화사). 스승인 컬럼비아대학교 모이라 커튼 교수의 권유로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커튼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그녀는 장애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의미 있는 인생으로 창조해냈다.' 134㎝에서 성장을 멈춘 그녀는 굽 높이가 10㎝가량 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10㎝굽 내 신발은 '사륜구동'

―신발 굽이 굉장히 높다.

'포 바이 포(4×4) 사륜구동이다.(웃음) 이 신발을 신고 세상을 누볐다.'

―다리가 길어 보인다.

'멋 때문은 아니다. 다리가 10㎝만 더 길었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었다.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허공에 떠서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한다. 구두가 그 10㎝를 채워준다.'

―몸이 얼마나 불편한 건가.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1인치 짧아서 늘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척추가 왼쪽으로 휘어져 있어 허리가 아프고, 20~30m 걸어가려면 서너번 쉬어야 한다. 통증을 줄이려고 허리복대를 13년 동안 감고 다녔다. 앉아 있는 게 힘들다. 공부는 엎드려서 하거나 누워서 한다.'

―책을 냈다.

'절망하는 20대를 위해 썼다. 자기 앞에 놓인 무수한 장애물들을 뛰어넘지 못할 때마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가장 나답게 뛰어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좌절하지 말고 자기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20대인 그들이 '지금'을 놓고 절망한다면 그건 공짜 심보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게 말도 걸어보지 않고, 살아보지도 않고, 제값만 받으려고 하는 거니까.'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쓸모없는 딸로 태어나 시작된 시련이었다.(웃음) 엄마가 정신질환으로 운신을 못하니 아홉 살 때부터 내가 집안살림을 했다.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스스로 세상을 버리셨다. 가난, 고생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건 이해할 수 없더라. 우리 집이 불행해진 게 다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때리고 구박했다. 날 낳은 친엄마가 맞나 의심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나이 드니 알겠더라. 엄마는 나를 핍박함으로써 장애인 딸을 구하려고 하셨던 거다. 갖다버리라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엄마는 그녀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한 거였다.'

―엄마와 화해하셨나.

'어느 해 명절인가. 편물기술자가 되어 직장생활 할 때인데, 명절 음식을 담아 계속 내 옆에 갖다 놓으셨다. 먹지 않았다. 내게 엄마에 대한 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계속 음식을 바꿔서 담아내 오시더라. 손도 안 댔다. 아침부터 밤 여덟 시까지 그 실랑이가 계속된 셈인데, 내가 졌다. 눈물이 펑 터지더라. 2시간을 울고 나서 부침개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웃음)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 데 24년이 걸린 거다. 그때 결심한 게 있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마음을 아는 데 20년이 넘게 걸렸다면, 앞으로 내가 살면서 만날 수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는 거였다.'

◇오늘까지만 살고 죽자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가 영어책이라며 보여주는데 울컥했다.(웃음) ‘I am a girl. You are a boy’라고 읽는 거라며 가르쳐주길래, 두 번째 월급 받은 날 서점에 가서 ‘국어완전정복’과 ‘영어완전정복’을 샀다. 마침 내가 일하던 집이 한의원이어서 곳곳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천자문 책을 주시더라. 그때 시작한 한자공부가 사서오경까지 이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책 속의 세상은 바르고 아름다웠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란 글귀가 좋더라.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미움과 증오, 슬픔의 감정들도 책을 읽으면서 치유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책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식모를 그만두고 직업훈련원으로 갔다.

“반상회보에 무료 직업학교 훈련생 모집이라는 광고가 났다. 기술을 배우면 식모 월급 3만원보다는 많이 벌겠다 싶더라. 양재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기계편물로 지망해 6개월간 배웠다.”


 

지난 5일, 비 내리는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중부기술교육원)에서 김해영씨를 만났다. 그녀가 서울에서 다닌 유일한 학교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기술을 배우면서 검정고시도 치렀다.

“그때는 중졸, 고졸이라는 학력이 무척 갖고 싶었다.(웃음) 낮에는 기술 배우고 밤에는 야간학원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책상이 높으니 의자에 책을 몇 권 깔고 앉아 공부했는데, 앉은 자세로 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심해져 집에 돌아가 두 시간씩 울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언가를 새로 배울 땐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육체적 고통도 잊을 수 있었다.”

―국내외 기능대회를 섭렵했다. 1983년 전국장애인기능대회, 1984년 전국기능대회 편물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고, 198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손으로 뭔가를 하는 일에서는 뒤처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허리와 다리가 약한 반면 손의 힘이 상대적으로 발달했다. 뭘 새로 배우는 걸 겁내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어도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프니까 뭐든 빨리빨리다.(웃음)”

―책에는 직업훈련원 다니던 시절 신앙을 갖게 됐다고 적혀 있더라.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을 만큼 내 마음은 닫혀 있었다. 직업학교 들어갈 때 종교를 쓰라기에 ‘자신교’라고 썼을 정도다.(웃음) 세상에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학교에 와보니 나를 위해 걱정해주고 내 앞날을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더라. 부모님도 걱정해주지 않던 내 앞날을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그들이 고마워 교회를 따라다녔다.(웃음)”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없었나.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었지.(웃음) 심지어 친구들 걸음속도를 못 따라가 혼자 뒤처질 때도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돌아가지 않나. 내가 죽어서도 저 별이 빛날 것 같으면 무슨 소용이냔 말이지. 그래서 결심했다. 좋아,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까지만 살고 죽자!”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1990년 김해영은 아프리카 극빈국 중 하나인 보츠와나로 떠난다. 한 선교단체의 회보에 실린 광고를 보았다.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 단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계편물의 장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월급 많이 주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다. “그곳에는 나처럼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약간의 기회와 교육과 격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성장할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사서 고생하기를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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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세계의 그늘진 곳을 누비는 국제사회복지사.”지구본을 끌어안고 김해영씨가 활짝 웃었다. /이준헌 객원기자

“실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학력고사를 봤는데 연거푸 떨어졌다.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우연히 거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게 됐다. ‘직업선택 십계명’이란 제목인데 ‘아무도 가지 않는 쪽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는 구절이 가슴을 파고들더라. 황무지 보츠와나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칼라하리 사막의 ‘굿 호프(Good Hope)’라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50~60년대 풍경이었다. 전기도, 전화도 없고 도로포장도 안 된 오지였다. 사막 한복판엔 흰색의 일자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암담하더라.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교사 학생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했다.”

―후회막심했겠다.

“처음에만.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플 때 제일 힘들더라. 하지만 나는 굿 호프에서 행복했다. ‘You are so beautiful’이란 말을 거기서 처음 들었으니까.(웃음) 키 작고 볼품없는 나를 그들은 예쁘게 봐주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했다. 세면장, 싱크대 밑, 교실 칠판 아래에다 아이들은 나만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기적적으로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당신의 무엇이 그들을 매료시켰을까.

“나의 ‘잘나지 않음’ 때문이겠지.(웃음) 많은 이가 선교를 명분으로 들어오지만 원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 가르치려는 태도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을 낳는다. 나는 학교의 주인공은 원주민 학생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내가 옳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버렸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게 큰 장점이 됐던 것 같다.(웃음)”

―4년 만에 굿호프 직업학교가 폐교됐다. 하지만 당신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있는데 편물과 여학생 다섯 명이 찾아와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떠나지 말고 계속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더라. 꿈을 심어준 사람들은 떠났지만 뿌려진 꿈의 씨앗은 자라고 있다는 걸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나를 선생이라고 믿고 찾아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는 이 텅빈 사막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가 있었다. 다시 운영진과 이사진을 꾸렸고 내가 교장을 맡았다. 10년간 교장으로 일하는 동안 학생 15명이 80명으로 늘었다.”

―의식주가 열악한 것은 물론, 권총강도가 성행할 만큼 위험한 지역이라더라.

“어린 시절부터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게 서바이벌할 수 있는 힘이 돼주었다.(웃음) 사막이 왜 좋은가 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같은 고독, 텅 빈 땅에서 얻는 영성이 있다. 도덕, 신앙을 떠나 생명 그대로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법을 나는 그 거대한 칼라하리 사막에서 배웠다. 비를 피할 지붕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있음만으로 나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사막에서 깨달았다.”

◇무일푼 그녀, 맨해튼에서 웃다

―2004년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

“내가 쿨쿨 잠만 자도 학교가 저절로 굴러갈 만큼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그런 생활이 마음에 안 들었다. 뭔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인생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다. 잔잔한 호수처럼 열정과 재미가 없었다. 고생하며 살 운명이라 그런지,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앞에 떨어지면 그걸 즐기며 도전하는 심리가 강한 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 미국으로 갔다.”

―서른아홉 살에 뉴욕에 있는 나약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다.

“뉴욕선교부에 계시던 목사님이 추천해주셔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다니, 꿈만 같았다. 엄마의 건강도 좋아졌고 동생들도 일가를 이뤄 살고 있으니 이제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되었다. 무일푼이었지만 맨해튼 한가운데 서 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더라. 아프리카 그 거대한 사막에서 살아나온 내가 아닌가. 무서울 게 없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 공부가 어렵진 않았나.

“기술 연마라는 게 집중과 반복의 연속이라 학교 공부에 필요한 집중력, 학습력은 그때 이미 습득했다. 4년 내내 4.0만점에 3.8점을 유지했다.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리포트를 날짜 넘겨서 내본 적도 없다. 성적 우수한 학생 명단에 늘 내 이름이 있었으니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학비였다. 첫 학기 학비만 4950달러였다. 월급 없이 14년을 보츠와나에서 살았으니 내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채워지더라. 내 사정을 전해들은 교포들이 장학금을 대주시고, 휴스턴에 있는 한인교회 청년들은 500불씩 모아 생활비로 보내주셨다. 미국에서 공부한 7년 동안 등록금이 없어 중도포기할 위기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그래서 내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나를 선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엄청난 장벽이었을 텐데.

“직업학교 졸업하고 용인의 편물 하도급공장에서 일할 때 내 영어공부는 시작됐다.(웃음) 편물기계 옆에 영어 발음기호를 써 붙이고 보고 외우던 게 엊그제 같다. 영어에 익숙해진 건 보츠와나에 와서다. 영어를 쓰는 나라라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맨땅에 헤딩하기로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런데 영어보다 중요한 게 만국공통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공통어에 능했던 것 같다. 표정과 손짓, 눈빛이 전하는 뜻 말이다. 거기에 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아픔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다들 불가능하다며 말렸다. 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내 추측인데, 입학 에세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1994년 5월 모든 사람이 보츠와나의 굿 호프 직업학교를 떠난 뒤 나 혼자 남았을 때의 이야기로 에세이는 시작된다. 동양에서 온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14년 살다가 온 것만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준 것 같다. 감사할 뿐이다.”

―컬럼비아 대학원까지 가서 석사과정을 밟을 필요가 있었을까.

“저개발국가일수록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미 아프리카 생활에서 경험했다. 장애인인 데다 내세울 만한 가족적, 사회적 배경이 없는 내겐 컬럼비아 대학만큼 확실한 배경이 없다고 판단했다. 인턴활동 600시간을 채워야 하고 33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석사향상반 과정이라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잤지만 원 없이 공부한 시절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부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올가을부터 부탄 여성들에게 체계화된 편물기술을 교육하게 된다. 보츠와나에도 1년에 한 번은 들어가서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핀다. 한국에 들어오면 제천에 있는 아동보호시설에 간다. 소년범죄에 연루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인데 상담해주고 검정고시 특강을 해준다. 열두살부터 스무살 아이들에게 내 얘기를 들려준다. 아프리카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그걸 희망적으로 해석하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긍정하라? 너무 막연한 충고 아닐까.

“사람들은 나의 작은 키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작은 키가 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못나고 작아서 더 쉽게 마음문을 열었다. 특히 아이들은 제 키와 비슷한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저희를 내려다보거나 위협하지 않으니까.(웃음) 부탄이든, 아프리카든, 한국이든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하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당신을 움직이는 초인적인 힘은 무엇일까.

“엄마에게 매 맞고 자란 기억, 아버지의 죽음이 내겐 다이아몬드다. 거기에 빚을 지고 살고 있다. 행복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 만, 아픔과 상처는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남아 반짝반짝 빛을 내더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그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다시 미국 유학을 가능하게 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곧은 등, 긴 다리를 갖고 싶겠지?

“물론이다. 하지만 그래서 또 놓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견뎌낼 만한 고통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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