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만 기대는 건 ‘아마추어’…노력 더해야 ‘프로’
| 기사입력 2013-07-02 20:05
[한겨레]
[사이언스 온] 인지과학으로 푸는 ‘공부의 비밀’ ①
창의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명쾌한 답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 이뤄진 과학 연구로 볼 때 창의성에 대한 우리 상식에서 몇 가지 과장된 부분을 짚어볼 수 있다.
새 정부가 국정과제의 하나로 ‘창조경제’를 내걸었다. 창조성은 창의성의 다른 말이다. 미래창조과학부라고 이름에 ‘창조’가 들어가는 부처도 만들었으니 창조경제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어떤지 알 만하다. 창조경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두고 말이 많기는 하지만, 창의성과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창의성은 생겨난 지 오래되지 않은 말이다. 영어에서 창의성을 뜻하는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는 19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구글의 ‘엔그램 뷰어’를 이용하면, 16세기 이래로 출판된 500만권의 책에서 단어들이 쓰인 빈도를 살펴볼 수 있다. ‘창의성’이라는 말은 1900년에 1억 단어마다 한두 번 정도 쓰이는 데 불과했지만 2000년에는 10만 단어마다 한 번씩 쓰였다. 100년 만에 1000배나 더 자주 쓰이게 된 것이다. 10만 단어에 한 번꼴로 쓰이는 다른 단어로는 ‘오렌지’가 있다. 창의성이 오렌지만큼이나 흔한 세상이다.
말이 넘쳐난다고 해서 정말로 창의성이 넘쳐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창의성은 줄어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윌리엄앤드메리대학의 교육심리학자인 김경희 교수는 1990년대 이래로 모든 연령대에서 미국인의 창의성 검사 점수가 계속 낮아지고 있다는 결과를 2011년 보고했다.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섣부르게 일반화하는 것은 피해야 하겠지만 충격적인 결과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명쾌한 답은 아직 없다. 창의적인 사고의 특성과 창의성을 측정하고, 가르치고, 키우는 방법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역사도 짧고 양도 질도 부족하다. 다만 지금까지 이뤄진 과학 연구로 볼 때 창의성에 대한 우리 상식에서 몇 가지 과장된 부분을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흔한 상식에 따르면, 창의성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단기적인 성과, 지나친 경쟁, 끊임없는 감시는 창의성을 파괴한다. 그렇지만 무한정 자유롭기만 한 것도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1990년 미국 심리학자 로널드 핑크는 의외의 실험 결과를 보고했다. 핑크는 사람들에게 구, 원뿔, 원기둥, 갈고리 등 여덟 가지 모양의 단순한 부품들을 조합하여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게 하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부품의 크기는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지만 부품 모양은 여덟 가지 중에 세 가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부품을 조합해 만들 작품은 가구, 장난감, 무기 등 여덟 종류로 제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실용성과 독창성, 두 가지 측면으로 창의성을 평가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는
창의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그냥 솟아오른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일 수 있다
결국, 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
두 바퀴 다 필요한 것이다
이 실험에서 핑크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제한조건을 걸었다. 첫번째 조건에서 사람들은 부품 세 가지는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지만, 만들 작품의 종류는 가구를 만들라, 장난감을 만들라, 이런 식으로 정해주었다. 두번째 조건에서는 반대로 가구를 만들든지 장난감을 만들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부품 세 가지는 미리 정해주었다. 세번째 조건은 앞의 두 조건보다 제한이 더 심해서 정해진 부품으로 정해진 종류의 작품을 만들게 했다.
실험 결과, 세번째 조건에서 사람들은 독창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작품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 사람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품이나 만들 작품의 종류를 자유롭게 고르게 하면 익숙한 형태로 만들기 쉽다. 세번째 조건에서는 부품도 작품도 모두 정해주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물건과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창의성에 대한 다른 상식 하나를 더 짚어보자. 중요한 과학적 발견에 대한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어느 한순간에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극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순간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다. 창의성은 이렇게 한순간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데 그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상식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발산적 사고는 창의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허공에서 그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아이디어도 그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을 수 있다. 미국 인지과학자 허버트 사이먼이 1990년에 보고한 실험 결과를 보자. 사이먼은 간단해 보이지만 아주 까다로운 퍼즐을 사람들에게 주고 풀게 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참 끙끙대다가 어느 순간 ‘아하!’ 하며 간단히 퍼즐을 풀었다.
사이먼은 이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퍼즐을 풀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말하게 했다. 그리고 이 말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니 ‘아하!’ 하고 외치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그 실마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사람들은 그 실마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한순간에 반짝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로 퍼즐을 푼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오래전부터 아이디어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디어가 많고 다양한 것만으로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창의적이려면 이런 아이디어들을 잘 모으고 정리해서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드는 수렴적 사고도 중요하다. 창의성에 대한 여러 연구는 창의적 사고가 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 짚어본 창의성에 대한 두 가지 상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창의성이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진다는 발상이 담겨 있다. 상상력과 아이디어도 확실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지식과 기술, 그리고 노력의 가치도 얕잡아 보면 곤란하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가장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 누구도 상상력과 아이디어만으로 그런 업적을 쌓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노벨상에 해당하는 업적은 30대 후반에야 이뤄냈다. 박사를 받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고도 뛰어난 업적을 쌓는 데까지는 십수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들은 평균보다 2배는 많은 논문을 써냈다.
수학자 이인석 서울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창의성이 있다는 생각은 남들은 모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과 동치이다. 앞 시대를 살다 간 수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창의성만을 기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프로’는 먼저 수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창의성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수많았던 천재들의 업적을 일이년에 이해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재명 서울대 인지과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사이언스온 연재물 ‘인지과학으로 푸는 공부의 비밀’의 21편 글 중에서 골라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