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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론을박 ‘명성황후 생존설’… 역사 속 ‘구멍 메우기’ 과제로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03
조회수
5,402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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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론을박 ‘명성황후 생존설’… 역사 속 ‘구멍 메우기’ 과제로

경향신문신문에 게재되었으며 24면의 TOP기사입니다.24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24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2 21:49 | 최종수정 2013-07-02 23:04 기사원문
 
명성황후는 시해 과정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다. 고종·순종을 비롯한 다른 왕실 구성원들의 사진은 남아 있는 데 비해 명성황후의 모습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정신>(1904)에 실린 사진, 명성황후로 알려졌으나 궁녀로 밝혀진 사진, 유럽 잡지에 고종·순종의 사진과 함께 ‘시해된 왕비’란 제목으로 실린 사진, 러시아 작가 토카레프가 <독립운동 사진집>에 실린 명성황후 추정 사진을 토대로 그린 초상화(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경향신문 자료사진

ㆍ“새 중전 들이지 않은 고종 경호원 사바틴 행적도 의문”

ㆍ“피신설이 설득력 가지려면 더 많은 반박 자료 나와야”

명성황후가 어떻게 시해되었는지는 오랫동안 논란이 돼 왔다. 시해를 입증하는 자료로 쓰이는 ‘에조 보고서’ ‘우치다 보고서’ ‘베베르 보고서’나 당시 서구의 언론 보도는 시해 현장을 두고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 피신·생존 가능성을 담은 기록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건축기사이자 경호원 사바틴의 시해 목격 증언을 담은 베베르 보고서에는 생존을 시사하는 내용도 함께 있다. 같은 보고서를 두고 학자마다 달리 해석하는 일도 벌어진다. 예를 들어 ‘에조 보고서’는 시해 증거 자료이지만, 에조가 쓴 명성황후 시신 능욕을 두고선 한쪽에선 일본 만행의 근거로, 다른 한쪽에선 ‘역사 윤색’의 자료로 제시한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해 생존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영국의 외교 문서 공개(경향신문 7월1일자 1·2면 보도)로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따져 당시 기록에서 드러난 사건의 빈 구멍을 메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생존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도 이어지고 있다.

명성황후 생존을 주장하는 이들은 ‘실체 재규명’에 적극적이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한국의 왕비(명성황후)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가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는 러시아 주재 독일 대사 후고 라돌린의 문서를 발굴, 공개했다. 정 교수는 명성황후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점, 시해 입증의 근거로 쓰이는 자료가 대부분 일본인이 작성한 점, 고종이 을미사변 직전 일본 공격을 알고 대비했다는 점(베베르 보고서)을 든다. 정 교수는 “고종이 명성황후가 죽은 뒤 새로운 중전을 들이지 않은 점은 황후의 생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정황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발굴 자료에 일본의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을 두고 “을미사변 즈음 독일은 러시아와는 관계가 좋았지만 일본과는 안 좋았다”며 “역선전에 휘둘릴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의 시해 목격담과 증언, 관련 보도가 일치하지 않는 점도 풀어야 할 문제다. 2011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를 출간한 신용우 작가는 “역사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빌렸을 뿐 을미사변 자체는 ‘베베르 보고서’와 ‘에조 보고서’ 같은 자료를 분석해 썼다”고 한다. “당시 ‘노스 차이나 헤럴드’는 뜰에서 죽은 걸로 보도했고 영국기자 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에 나온 시해 장소는 복도”라고 했다. 당시 조선은 정확한 상황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명성황후가)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한다.

신 작가는 “2001~2002년 TV프로그램과 월간지를 통해 한국에 널리 알려진 베베르 보고서가 등한시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명성황후 시신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바틴이 사건 전날 변란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라며 “실패한 경호원인 사바틴이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윤허를 받아야 하는 경운궁 중명전, 석조전, 정관헌 설계에 관여한 것도 의문점”이라고 말했다.

역사학계는 이런 정황과 최근 나온 서구 외교 문서가 정설을 뒤집을 만한 반증 자료는 아니라고 본다. 역사학계 원로인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예전에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를 냈다. 그는 “증언, 회고록, 재판기록 등 을미사변을 세부적으로 다룬 여러 사람들의 많은 자료가 있다”며 “시해 이후 2년2개월간 준비한 장례식 자료는 매우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한국인이 쓴 구체적 자료가 없다고 하는데) 정교가 고종 1년부터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대한계년사>와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명성황후가 데리고 다니던 일본 여자 아이가 사건 현장에서 명성황후를 확인하고 끌려온 순종이 시신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도 말했다. “(생존을 주장한다면) 시해를 막으려다 죽은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충단’ 현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라고도 했다.

한 교수는 “(생존 주장이) 완전한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동안 나온 기록을 반박할 만한 자료들이 더 나와야 한다”면서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생존 가능성을 담은 독일 외교문서에 대해 “독일인이 전언의 형태로 쓴 간접 자료인데 당시 서구 자료 가운데는 부정확한 것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굴 자료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며 “당시 서구 외교관들이 어떤 맥락에서 왜 그런 자료를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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