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安重根 하얼빈 의거 현장… 안내판 하나 없이 달랑 '▷(저격 지점·방향)' 표시
A11면
| 기사입력 2013-07-0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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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룽장성 하얼빈=안용현 기자 |
[朴대통령, 시진핑에 '安 의사 기념비' 제안… 현장 가보니]
-찾기 힘든 역사의 현장
한국인은 열차표 사야 들어가… 驛 플랫폼 입장까지만 2시간, 바닥 삼각형 표시도 잘 안 띄어
-기념비 세운다면
1930년 '이토 비석' 있던 자리에 안중근 의사 기념비 설 가능성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역 역사(驛舍) 건물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을사늑약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던 플랫폼이 살짝 보였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곳에서 거사(擧事)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8일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이 역사 현장에 '안 의사 기념비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시 주석도 이해를 표시하며 관련 기관에 검토를 지시했다.
현재 하얼빈역 플랫폼에는 안 의사 의거 현장이 표시돼 있다. 그러나 현장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1일 오전 도착해 플랫폼에 들어가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중국인은 역사 1층에서 1위안(180원)짜리 입장권을 끊고 곧바로 들어갔지만, 한국인은 반드시 열차표를 사야 했다. 당일 열차표를 파는 2층으로 올라갔더니, 평일인데도 20m 이상 줄을 섰다. 50여분을 기다려 가장 가까운 이웃 역인 솽청푸(雙城堡)로 가는 입석표를 11위안(2000원)에 구입했다.
간신히 플랫폼에 들어갔는데 의거 장소 표시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플랫폼에는 한국어는커녕 중국어 안내판도 없었다. 바닥만 내려다보고 두 번 왕복했으나 허탕이었다.
역무원의 안내를 받아서야 1번 플랫폼에 저격 현장은 삼각형(▷)이 들어간 타일로, 피격 현장은 마름모형(◇)이 들어간 타일로 표시해 놓은 장소를 발견했다. 삼각형(▷) 표시가 총탄이 날아간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토가 쓰러진 장소(◇)까지 6m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삼·사각형 표시와 바닥 색깔이 비슷해 누가 알려주기 전에는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역무원 자오(趙)씨는 '안중근은 항일 영웅(英雄)'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 역무원과 항일 역사에 관심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안중근을 아는 중국인은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열차를 타려고 의거 현장을 지나는 중국인 3명에게 '안중근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고 답했다. 최근 단둥에서 하얼빈으로 옮겼다는 한 역무원도 '안중근이 누구냐"고 반문했다. 자오씨는 '안 의사 기념비 설치는 처음 듣는 얘기지만, 시 주석이 동의했다면 이른 시일 내 성사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 의사 의거 현장에 '표시'가 등장한 것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고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하얼빈에 주둔하던 일본군 731부대는 이토 추모비에 묵념한 뒤 귀대(歸隊)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석은 1949년 집권한 중국 공산당이 제거했다. 공산당은 비석 자리에 의거 개요만 적은 안내판을 세웠다. 안 의사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었다고 한다. 지금 하얼빈역 바닥에 있는 저격·피격 지점 표시는 1990년대 후반 대규모 역사 보수 공사를 하면서 안내판 대신 만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토 추모비가 있던 자리에 안 의사 기념비를 세우자고 중국에 제의한 셈이다.
안 의사 자취는 하얼빈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얼빈시 안성제(安升街)의 조선민족예술관 2층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있다. 조선족들이 하얼빈시와 독립기념관 등의 지원을 받아 2006년 개관해 운영 중이다. 500여㎡ 공간에 안 의사 동상과 의거 장면을 재현한 미니어처 등 관련 자료 4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매년 한국인 1만여명이 찾는다고 한다. 기념실 직원은 '일본인도 매년 100여명쯤 온다. 모금함에 돈을 넣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하얼빈 시내 자오린(兆麟)공원(옛 하얼빈공원)은 안 의사가 의거 사흘 전에 들렀던 곳이다. 안 의사의 친필 유묵인 '청초당(靑草塘)'과 '연지(硯池)'라는 글자를 앞뒤로 새긴 비석이 있다. 안 의사는 뤼순(旅順) 감옥에서 자신의 유해를 이곳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는 소재를 몰라 발굴조차 못 하고 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안용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