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청소년 파고드는 ‘하이티즘 신드롬’
| 기사입력 2013-07-03 10:58
“요즘 엄마들 모임에 나가면 성적 얘기만큼 민감한 사안이 있어요. 바로 ‘키가 얼마냐’는 이야기예요. 딸은 168㎝, 아들은 185㎝로 키우는 게 엄마들의 로망이라고 해요.”
한 번은 필자의 아내가 학부모 모임에 갔다 와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럼 내 키(185㎝)가 표준 키라는 말이야? 그건 말도 안돼요.” 필자는 아내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185㎝의 키는 큰 키에 해당하지 평균 키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들을 둔 엄마들은 너나없이 185㎝로 키우려고 아우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180㎝가 넘으면 장신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중·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녔던 1970~80년대에는 큰 키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키가 큰 게 늘 부담이었다. 그래서 키 큰 사람들은 대개 어깨가 구부정했다. 큰 키가 두드러지지 않게 구부리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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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만화그리는 목각인형 |
요즘은 185㎝의 ‘키큰남’이 대세인 듯하다. 어젯밤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다 ‘키작남’의 애환이 담긴 글이 눈에 띄었다. ‘165㎝의 키작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소개팅을 나갔다가 2분 만에 퇴짜를 맞았다. 소개팅 여성이 “전 저보다 키가 작은 남자와는 만나지 않는다”면서 만난 지 2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인간성보다 오직 키 하나만으로 자신을 판단한 그 여성이 너무도 야속했던지 ‘키작남’이라고 자조하는 글을 올린 모양이다.
‘맞선시장’의 풍경이 이렇다보니 당사자도 그렇지만 부모도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라고 한다. 아내는 학부모모임에서 이런 무용담(?)까지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한 엄마는 딸아이가 중2때 키가 155㎝밖에 안됐다. 딸은 특목고를 준비하느라 학원에서 새벽 1시까지 공부하고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다. 그래서 키가 작아 고민이라고 하소연했다. 급기야 더 이상 키가 안 클 것 같다는 딸의 고민을 듣고 엄마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엄마는 “155㎝에 명문대 다니느니 162㎝라도 만들어서 그저 그런 대학에 보내는 게 더 낫다”고 결론을 내리고 딸에게 말했단다. “학원을 끊자.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까 일찍 자고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어보자. 내가 162㎝까지는 키워주겠다!” 결국 엄마의 결단과 딸의 호응으로 목표로 정했던 162㎝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특목고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그 엄마는 공부보다 키크는 쪽으로 결단을 내린 건 잘한 것 같다고 주변 엄마들에게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여자아이 엄마가 이 정도니 남자아이나 그 엄마는 말할 것도 없다.
김경호씨(가명·21)는 고1때 전교 10등 안에 드는 우등생이었다. 언어 쪽에 감각이 뛰어나서 국어와 영어는 거의 만점이었다. 하지만 키가 157㎝이었는데 늘 운동화 속에 7㎝짜리 깔창을 신고 다녔다. 마치 개그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을 진행하는 개그맨처럼 말이다. 김씨는 여학생들과는 말도 하지 않으면서 지냈다. 키 때문에 여학생 앞에서 자신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심각한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명문대를 가도 이 작은 키로 사회생활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럴 때면 학교를 빠지기도 하고 집에서 며칠씩 문을 걸어잠그고 밥도 먹지 않고 잠만 잤어요.” 김씨는 결국 정신과 치료를 고등학교 3년 내내 받았다고 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척추를 펴는 수술’을 받으면 키가 클 수 있다면서 수술을 해달라고 졸랐다. 척추를 펴는 수술을 하면 키가 3~7㎝까지 늘어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수술이 있을까 엄마는 불안했다. 척추를 잘못 건드리면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데 무섭다는 생각이 엄마를 엄습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아들에게 ‘척추를 펴는 수술’을 대학 가면 해주기로 하고 아들을 달랬다. 아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됐다.
하지만 반복되는 우울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고3때도 초반까지는 내신도 잘 나오고 모의고사도 전영역에서 1등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키만 생각하면 무력감이 몰려왔다고 한다. 수능이 다가오자 우울증은 심해졌다. 결국 결정적인 시험에서 모든 게 엉망이 되곤 했다. 재수를 한 1년 동안에도 우울증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호전되었다가 다시 악화되기를 반복했고 수능때 그를 덮쳤다. 그는 3수를 한 끝에 현재 서울소재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나마 엄마의 눈물과 노력 덕분이었다, 엄마는 “애 아빠도 경호처럼 작지만 남자는 똑똑하고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며 “도대체 아이가 왜 저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경호 아빠는 대기업에 다니다 독립해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가족들에게 존경도 받으며 가정생활을 잘 이끌어오고 있어요.”
부모 세대엔 남자에게 외모보다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면 요즘은 능력보다 외모가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이렇게 남자를 평가하는 척도가 달라진 것이다. 아들에게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이미 통하지 않는다. 아들이 키가 작다고 고민한다면 그 말을 흘려듣지 말고 함께 고민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게다가 요즘은 중3이면 키성장이 거의 다 끝난다고 한다. ‘군대 갔다 와서도 큰다더라’ 같은 말이 위로가 안 된다. 필자는 고등학생 시절에도 컸지만 대학에 들어와서까지 키가 컸다. 이런 말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니콜라 에르팽의 ‘키는 권력이다’라는 책은 하이티즘 신화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에는 키 작은 사람(주로 남자)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데 정말 ‘키=권력’이라고 주장한다. 남자의 큰 키는 신분, 연봉, 연애, 결혼, 그리고 많은 요인들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른바 ‘키 프리미엄’(Height premium)이다. 여자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상대적으로 키 큰 남자를 고르는데 이는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는 것이다.
미국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는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차별 요소로 ‘외모’를 지목했다. 외모가 연애·결혼 등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형 등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키가 큰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면 사물의 극히 일부분만 보는, 지나친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세상은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말과 같은 이분법적인 발상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하이티즘 현상은 좀 과장된 듯하다<도표 참고>. 하이티즘은 미디어나 소비사회가 조장하는 ‘허깨비’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실체 없는 허상에 현혹되기보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당당한 능력과 자신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매력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성공은 ‘외모’보다 ‘내공’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혹여 아들이 지나치게 키에 집착하거나 또는 딸이 지나치게 남자를 평가할 때 키에 비중을 두지는 않는가.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이티즘에 대한 연구나 언론보도,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해본다면 허상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키는 결코 성공의 프리미엄이 아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