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막장 인생? 명장 일생!
A8면
| 기사입력 2013-07-04 03:10 | 최종수정 2013-07-04 08:10
[동아일보]
《7월 초의 태백산은 고즈넉하다. 겨울에는 눈꽃축제를 보러 오는 관광객으로 붐비고 7월 말만 하더라도 피서객들의 발길이 꽤 많지만 지금은 사람 그림자를 보기가 쉽지 않다.
강원 남부를 가로지르는 국도 38호선은 영월∼사북∼태백∼동해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차량이 강원랜드 카지노가 있는 사북에서 빠진다. 사람 발길이 뜸한 산에는 박달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가 서로 녹음을 겨루고 있다.
태백산 도립공원 입구에 자리한 태백 석탄박물관.
해설사 남효준 씨(70)는 오늘도 오전 내내 한가롭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물끄러미 산허리를 내려다본다. 1년 중 가장 한가한 요즘이 아니면 누리기 힘든 호사다.
바람 소리 가득한 숲을 흰 새 한 마리가 힘찬 날갯짓으로 가로지른다.
“작년부터 부쩍 황새가 많이 보이네. 어렸을 때도 못 보던 귀한 새인데. 하긴 사람들이 떠나 마을이 조용해졌으니 황새가 살기 좋을 수밖에….”》
30년 전 광원만 6만 명이 넘었다는 강원 태백시는 이제 전체 인구가 5만 명도 채 안 된다. 그래도 남 씨는 선산 소나무처럼 오늘도 이곳을 지킨다. 석탄 가루가 까맣게 묻은 작업복과 갱모는 이제 박물관 한구석을 차지한 전시품이 됐지만 산업전사의 자부심과 ‘막장인생’의 서글픔이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입소문을 듣고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남 씨의 ‘광부 아리랑’에 귀를 기울인다. “탄광 얘기 들을 게 뭐 있다고…”라며 손사래 치던 그는 담담하게 과거를 더듬기 시작했다.
열아홉 소년, 탄광에 들어서다
아버지는 광원이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 탄광에 강제징용돼 끌려갔다. 1943년 일본의 탄광에서 태어난 남 씨는 광복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생활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히코키’(‘비행기’의 일본어)라는 단어는 지금도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다. 단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깝지만….
“사람들이 ‘히코키’라고 외치면 뭔가 펑 하고 터졌어. 지금 생각해 보면 폭격이었던 것 같아.”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가진 거라고는 논 세 마지기(약 1983m²)뿐이었다. 밥벌이를 찾아 탄광에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강원 영월에 보금자리를 틀었지만 6·25전쟁 때 고향으로 피란을 갔다가 더 큰 광산이 있는 강원 삼척군 장성읍(현 태백시 장성동)으로 이사했다.
소년의 눈에 아버지는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비쳤다.
“한 달에 2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출근해야 봉급을 다 받을 수 있었는데 하루 일 나가면 다음 날은 집에 계셨어. 어느 날은 아프다고 계시고, 또 어떤 날은 나쁜 꿈을 꾸었다며 탄광에 가시지 않는 거야. 그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 하지만 나중에 직접 탄광 일을 해 보니 이해가 가더라고. 오죽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싶어.”
일본인들이 지어서 살다가 남겨놓고 간 주택의 단칸방에 부모님과 7남매가 살았다. 제법 공부를 잘했어도 타지로 유학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은 명문 강릉상고 진학을 권했지만 그는 태백공고 광산과를 선택했다. 하루빨리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게 7남매의 맏이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나이로는 19세 때였다. 싱그러운 햇살이 가득한 봄날이었다. 남 씨는 실습생 신분으로 난생처음 갱(坑)에 들어갔다. 햇빛이 한 줄기도 스며들지 않는 곳이었다. 시커먼 탄 먼지가 굴을 가득 메워 숨쉬기도 힘들었다. 심한 어지럼증을 느낀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선생님이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남효준! 여기서 이러면 죽는 거야.”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정신을 놓는 순간 괴물처럼 입을 벌린 갱이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래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탄광촌 자식에게 광원은 운명이었다.
“서독 가서 탄 캐면 큰돈 번다”며 너도나도 파독(派獨)을 지원할 때도 그는 태백을 떠나지 못했다. 맏아들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산업전사 광원’ 전성시대
고교를 졸업하고 곧장 군대에 다녀온 남 씨는 1967년 광산에 취직했다. 그가 몸담았던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는 예나 지금이나 국내 최대 탄광이다. 말단 공무원 봉급이 7000원 남짓하던 시절, 그는 첫 월급으로 1만 원을 받았다. 덕분에 단칸방에서 방 2칸짜리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벌이는 괜찮았지만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채탄보조로 막장에 처음 들어가니 동발(갱도를 떠받치는 나무기둥) 나르는 일부터 시키더라고. 너무 무거워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지. 그 자리에 주저앉으니 선배가 ‘그 따위로밖에 못하냐’고 소리를 지르데.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었어.”
초등학교도 못 나온 일꾼이 흔했던 당시 광산에서 고교 졸업장을 가진 그는 손꼽히는 고학력자였다. 남이 못 쫓아올 기술을 익히자고 작정했다. 한 달에 휴일이 고작 하루에 불과할 정도로 근로환경이 열악했지만, 퇴근하면 지친 몸을 이끌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렇게 광산보안기사 자격증을 따 탄광에서 가장 알아준다는 ‘사람 살리는 기술자’가 됐다.
1970년대는 남 씨에게나 태백 광산촌에나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번화가인 황지읍(현 태백시 황지동)에는 술집이 줄을 이어 들어섰다. 여성 접대부만 100명을 둔 술집까지 생겼다. 탄광이 갑을병 3교대로 24시간 내내 돌아가다 보니 식당, 술집도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2개 면(面)을 제외한 모든 지역 출신이 다 있을 정도로 태백에는 외지인이 몰렸다. 벽촌에는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절, 태백에선 10집 중 9집이 TV, 라디오, 전기밥솥을 놓고 살았다.
석탄 수송을 위한 철도가 2, 3년 주기로 완공될 때면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이곳을 찾아 기념테이프를 잘랐다. 대통령이 다녀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촌에 마을회관, 공동목욕탕, 세탁소 등이 들어섰다. 장마철 수해라도 입으면 군(軍)이 복구 작업에 참여했다. 남 씨의 생활도 나날이 좋아졌다. 간부로 승진해 좋은 사택에 입주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이따금 서울에서 높은 분들이 방문해 “여러분이야말로 이 나라의 일등역군”이라고 치켜세울 때면 어깨가 으쓱했다.
정년을 한 해 앞둔 1995년, 남 씨는 정부가 최고의 기술자에게만 수여하는 ‘명장(名匠)’ 칭호를 받았다. 건국 이래 광원으로는 8번째였다. 안전구호 대원으로 100명이 넘는 광원의 생명을 구한 그에겐 ‘당연한’ 표창이었다. 태백역 광장에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고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칼국수 점심도 먹었다. 상금 1000만 원과 유럽 10일 여행권, 대통령 사인이 새겨진 봉황무늬 손목시계를 포상으로 받았다.
광산촌에서 가장 명예롭게 퇴임한다는 축하인사가 이어졌지만 왠지 모르게 흥이 나지 않았다. 석탄은 끝물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면서 시작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탄광들은 잇따라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장성 거리를 가득 메우던 광원들은 “이참에 막장일 때려치우니 좋다”며 고향으로, 공단으로 호기롭게 떠났지만 잘됐다는 얘기는 좀처럼 듣지 못했다. 가난에 떠밀려 마지막이라고 들어온 막장에서조차 밀려나는 신세. 4대문 밖에서 제일 번성한 곳이었다는 태백 탄광촌은 빈집만이 가득한 쓸쓸한 폐광촌이 됐다.
광원 명장, 박물관에 서다
하루가 멀다 하고 광산들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몇몇 남은 곳에서는 일솜씨가 좋은 남 씨를 찾았다. 대우를 두둑이 해 주겠다는 말에 출근했지만 일주일을 못 버티고 나왔다.
“40년간 탄광에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도 다시 막장에 들어가니 덜컥 겁부터 났어. 이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평생 일했나 싶더라고.”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시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 명장님. 이번에 시에서 석탄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했어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태백에서 그만큼 석탄과 탄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료 수집부터 전시물 선정, 시설 배치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물관이 세워지자 이번에는 ‘살아있는 옛이야기’를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2000년부터 촉탁 직원으로 박물관 해설사 일을 시작했다. 촉탁으로마저 2007년 정년을 맞이했지만 그는 ‘프리랜서 해설사’로 여전히 박물관에 몸을 담고 있다.
석탄박물관에는 남 씨의, 아니 대한민국 광원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기둥 뒤에 붙인 조악한 부적부터 ‘죽을 사(死)’라 해 밥 네 주걱은 절대 담지 않던 도시락까지 하나하나 모두가 탄광촌의 때 묻은 삶의 귀한 흔적이다. 간혹 예전에 광원 일을 했다는 관람객이 찾아오면 옛 추억을 서로 나누다 어느새 함께 손을 잡고 울컥 눈시울을 붉힌다.
남 씨는 태백을 “어머니 같은 땅”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평생 한 몸을 희생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처럼, 온 나라에 산 깊숙이 품고 있던 탄을 내주고 이제는 내주려야 줄 게 없는 신세가 된 땅. 요즘 아이들은 연탄을 구경조차 못하지만, 그런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전설’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게 뿌듯하다.
에너지도 최첨단 원자력을 쓰는 21세기라지만 원전 안전 문제에 대한 불상사를 신문으로 접할 때마다 ‘안전 명장’ 남 씨는 고개를 젓는다. 30년 전 광산보안만도 못한 ‘대충대충’ 일처리가 사태를 키웠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온 나라가 에너지가 부족하다며 떠들썩한 요즘이기에 남 명장의 자부심은 새삼 빛을 발한다.
“저 산의 울창한 나무를 누가 키웠을까. 석탄이 키운 거야. 석탄이 없었으면 진작 땔감으로 쓰였을 나무들이지. 누가 대한민국을 산업사회로 이끌었을까. 바로 광원들이야.”
태백=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