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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 쿠데타] 30년 독재(2011년 무바라크 하야) 딛고 선 民政도 몰락… 출구 안보이는 이집트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05
조회수
5,621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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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 쿠데타] 30년 독재(2011년 무바라크 하야) 딛고 선 民政도 몰락… 출구 안보이는 이집트

조선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3면의 TOP기사입니다.A3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3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5 03:05 기사원문
 

[軍部, 무르시 대통령 1년만에 축출하고 다시 정치 전면에]

-무능한 정권에 반발

불황·실업 前정권보다 심해져

대통령 권한 강화한 헌법 강행… 공기업 등에 측근 정실인사도

-정국 '視界 제로'

노선 다른 이질적 정파 모여 권력 다툼땐 큰 혼란 가능성… 親무르시파와 내전 우려도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던 독재 정권은 2년 전 민주화 시위 18일 만에 무너졌고, 이후 들어선 민주 정권은 1년 남짓 버티다가 퇴진 요구 시위 4일 만에 무너졌다.

이번 무함마드 무르시(61) 이집트 대통령의 축출 과정은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85) 전 대통령 하야 과정과 흡사하면서도 훨씬 규모가 크고 신속했다. 두 번 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고, 야당이 가세하고 관료들이 등을 돌리더니 군(軍)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끝났다. '30년을 참다가 민주혁명을 이뤄낸 이집트 국민은 이제 단 1년도 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4일 파이낸셜타임스)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이집트에서 어떤 세력이 어떤 절차를 통해 집권하든 정국이 불안할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무르시의 어설픈 독재가 반발 키워

이집트 군부가 전광석화처럼 세력을 모아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르시의 '어설픈 독재' 덕분이었다. 공대 교수 출신으로 정치 무명(無名)이던 무르시는 지난해 무슬림형제단이 창당한 자유정의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집트 공화국 60년 사상 처음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첫 민간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는 컸다. 민주주의 회복은 물론 경제난과 치안 불안, 종파 대립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무르시는 '이슬람 독재'에 나섰다. 대통령 권한 강화와 이슬람 율법에 의한 통치를 내용으로 하는 '파라오 헌법'을 밀어붙이고 주요 언론과 공기업을 대상으로 측근 정실 인사에 골몰했다. 사법부와 야당, 민영 언론과 학계, 여성과 소수 종교 등 모든 집단을 적으로 만들었다.

무르시 집권 기간 정국 불안으로 경제는 더욱 곤두박질쳤다. 2011년 1월 당시 360억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2013년 1월 130억달러로 급감했고, 화폐가치는 14% 폭락했다. 블룸버그는 '연료와 생필품 부족, 만성적 단전(斷電), 관광수입 감소로 인한 불황과 실업사태는 혁명 전보다 심해졌다'고 보도했다.

정국 '시계 제로'… 내전 우려도

이집트군은 3일 대통령 권한 정지와 헌정 중단을 선포했다. 이날 생방송 회견장엔 야당과 사법부, 반(反)이슬람·자유주의 시민 단체, 콥트 기독교 등 소수 종교의 대표는 물론 강경 이슬람 집단인 살라피 지도자까지 모였다. 야권을 이끌어온 노벨 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엘바라데이(71)는 '군부의 향후 일정은 2011년 시민혁명의 연속'이라며 쿠데타를 옹호했다. '반(反)무르시'를 기치로 뭉친 집단들은 사상과 신앙이 각각 달라 반목과 갈등이 심각한 사이였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불안한 동거가 이미 향후 이집트 정국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고 분석한다.

군의 전면 복귀도 갈등의 씨앗이다. 군은 지난해 초까지 18개월간 과도정을 이끌 때도 민정 이양 절차를 신속히 이행하지 않고 야권을 배제하거나 마구잡이로 시위를 진압해 반발을 샀다. 무르시 타도가 목적이었던 이집트 국민 대다수는 일단 환호하고 있지만, 혁명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다는 반감도 싹트고 있다. 서방 언론도 '쿠데타가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혼란을 종결하고 제2의 혁명을 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미 LA타임스) '군·기업·관료 등 반(反)혁명 세력이 뭉쳐 합법적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훼손했다'(영 가디언)며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철퇴를 맞은 무슬림형제단과 친(親)무르시파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막대한 세를 동원해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슬람 신자들이 3일 망연자실해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거나, 일부는 '피의 내전으로 복수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고 전했다. CNN은 '계엄 상태에서 관광·외자 유치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이질적 집단의 동거 체제로 이집트 경제와 정국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정시행 기자]
 

[이집트 군부 쿠데타] 이집트 사태에 국제유가 급등… 배럴당 100달러(美서부 텍사스산 원유) 돌파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13-07-05 03:05
이집트 정국이 불안해지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해,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다. 3일(현지 시각)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 마감된 8월 인도분 미국 서부 텍사스원유(WTI) 가격은 전일에 비해 1.64달러(1.67%) 오른 101.24달러를 기록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5월 이후 14개월 만의 최고 수준이다.

런던 거래소의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도 배럴당 105달러까지 치솟았다.

국제 유가가 치솟은 이유는 이집트 사태로 인해 앞으로 원유 공급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파이프 라인은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원유 보급로로 하루 300만~400만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집트 정국 혼란으로 수에즈 운하 파이프 라인이 가동을 멈출 경우 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원유 수출로가 막히게 된다. 중동 지역의 원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약 3분의 1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집트 사태와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지역의 정국 불안이 지속될 경우 국제유가가 최고 150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원자재 투자회사 리도아일 어드바이저스의 제이슨 로트먼 사장은 '이번 이집트 사태로 유가가 심리적 저항선을 돌파했다. 앞으로 유가는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준우 기자]

 

이집트 후폭풍… 中東 '이슬람주의 세력' 최대위기

조선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6면의 TOP기사입니다.A16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6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5 03:05 기사원문
 

[군부 쿠데타로 무르시 대통령 축출… 중동 정치 지각변동]

'이슬람주의 정권 몰아내자' 튀니지 야권, 서명운동 돌입… 터키도 세속주의 입김 커질 듯

시리아 알아사드 대통령 '정치적 이슬람주의 몰락 환영'… 반군 대대적 압박 나설듯


군부 쿠데타로 이슬람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집트 사태는 이슬람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중동 지역 각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집트 주변 국가인 튀니지가 우선적으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와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튀니지는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23년 독재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당이 집권했다. 무슬림형제단 분파인 엔나흐당은 2011년 10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이후 세속주의 세력과 계속 충돌하고 경제를 살리는 데 실패하면서 정권 기반이 취약해진 상황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77%가 엔나흐당이 이끄는 국정 방향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튀니지 야권은 3일 이슬람주의 정권 축출을 위한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다만 튀니지는 벤 알리 대통령 일가에 집중된 오랜 독재로 군부 세력이 약해져 있어 이집트 군부처럼 정권을 전복할 구심점을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알리 라라예드 총리는 앞서 2일 이슬람주의 정권에 도전하는 이집트 상황을 언급하면서 '튀니지는 이집트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3년째 내전 중인 시리아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무슬림형제단이 주축인 반군 압박에 나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4일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은 이른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몰락'이라며 환영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은 지난 1982년 중부 도시 하마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일으킨 반란을 무참히 진압해 3만여명을 학살한 바 있다.

터키에서는 신정(神政)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 세력의 반격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터키에서는 최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이슬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전국적 시위가 벌어졌다. 현재는 정부와 시위대 대표의 합의로 양측의 대립은 소강상태다. 하지만 이집트 이슬람주의 정권 축출에 고무된 터키 세속주의 세력의 요구가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중동 지역의 정치 지형은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가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는 거대한 전환의 시점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샤디 하미드 브루킹스연구소 도하센터 소장은 워싱턴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랍에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간에는 정부와 종교의 역할, 국가의 정체성 같은 큰 문제에 대해 '펀더멘털 디바이드(Fundamental Divide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면서 '지금은 이슬람주의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수 기자]
 

군부, 60년간 정치 권력 핵심… 대통령 4명 배출, 군수산업부터 빵공장까지 이집트경제 40% 장악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13-07-05 03:05
이집트에서 군부 위상은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인 군부가 3일 사실상 쿠데타로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이집트 군부는 그동안 첫 민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의 이슬람주의 정책을 대체로 관망해 왔으나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벌어진 대규모 반(反)무르시 시위를 기회로 전격적으로 정권 축출에 나선 것이다.

1952년 공화국 수립 이후 군 출신 대통령을 4명 배출하며 60년간 정치권력 핵심에 있었던 군부가 지난 1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 배경에는 이집트 국민이 군부에 갖는 애증(愛憎)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집트 군부는 1948~1973년 4차례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국민 사이에서 유능한 엘리트 조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을 격퇴해 국민으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2011년 2월 '아랍의 봄'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군부가 무바라크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군부는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군부가 무바라크 축출 후 1년여간 군정을 연장하자 이집트 국민은 민정 이양을 촉구하며 저항했다. 군부는 대통령 직선을 용인하는 대신 대통령의 군 통수권·인사권·입법권 등을 제한하는 임시 헌법을 통과시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식물 대통령'이 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무르시 대통령은 당선 후 군부가 주도한 의회 해산을 철회하는 대통령 명령을 발동하고 과거 21년간 국방장관을 지낸 무함마드 탄타위 군 최고위원장을 경질하는 등 군부에 맞서며 대립했다.

군부는 무르시 정권 전복을 위해 야권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시기를 조율해 온 것으로 관측된다.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이 3일 무르시 대통령 축출 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는 범야권 지도자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이집트 최고 종교 기관 알 아즈하르 수장인 아흐메드 알 타이예브 대(大)이맘 등 민간 지도자들이 함께했다. 군부는 지난해 12월 무르시 정권을 향해 '정국 혼란이 계속되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아랍권 최대 규모인 46만 병력을 보유한 이집트군은 군수산업을 비롯해 빵공장·주유소·제조업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집트 경제의 약 40%가 군부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무르시 정부 출범 후 군부의 체질이 어느 정도 바뀐 것으로 보였지만 이번 사태로 이집트는 여전히 군부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한수 기자]
 

[이집트 군부 쿠데타] 난처한 美… 쿠데타 표현 안 쓰고 '깊은 우려'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13-07-05 03:05
美언론 '사실상 묵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각) 이집트 군부의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축출 발표 직후 척 헤이글 국방장관,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과 긴급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성명 발표는 그후 약 4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만큼 미국이 이번 사태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를 놓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는 얘기다.

오바마는 성명에서 '미국은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전복하고 헌정을 중단시킨 이집트 군부의 움직임에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고 했지만 '쿠데타'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오바마는 그러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 정부에 전권을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그리고 포괄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통해 신속하고 책임 있게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한다'며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을 임의로 체포해서는 안 되며 이집트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이집트 군부의 개입에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일방적인 비난은 하지 않았다. 자칫 한쪽 편을 들어주는 인상을 줬다가 반미(反美)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오바마는 '미국은 이번 사태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있으며 이집트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이집트 국민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불과 1년 전 무르시가 당선된 이집트 대선을 '아랍 민주화의 초석'이라고 칭찬했던 오바마 행정부가 이번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하는 듯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대신 오바마 행정부는 연간 15억달러에 달하는 대(對)이집트 군사·경제 원조를 '지렛대'로 권력의 민간 이양을 압박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바마는 이날 성명에서 '행정부에 이집트에 대한 원조 제공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미국 법령은 '선출직 지도자가 쿠데타로 추방된 나라에는 원조를 중단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미 정부가 향후 이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하느냐가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이집트, 또 광장의 권력교체… 軍-야권 손잡고 첫 민선대통령 몰아내

동아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6면의 TOP기사입니다.A6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6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5 03:11 기사원문
 

[이집트 무르시 대통령 축출]軍, 親무르시 세력 대대적 숙청 나서

[동아일보]

이집트 군부가 3일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을 집권 1년 만에 축출했다. 지난달 30일부터 이집트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무르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지 4일 만이다. 이어 4일엔 주요 방송국을 폐쇄하고 친(親)무르시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압둘 파타 알시시 이집트 국방장관은 3일 오후 9시(한국 시간 4일 오전 4시) 국영TV 연설에서 “국민과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 무르시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했다”고 발표했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을 공화국수비대 건물에 억류했다가 국방부 청사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는 또 무르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무함마드 바디에 무슬림형제단 의장과 사아드 알카타트니 자유정의당 대표를 전격 체포했다.

이어 무슬람형제단이 운영하는 이집트25 채널 등 3개 방송사를 폐쇄하면서 일부 언론인들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 같은 조치로 인해 이집트에서 군부 독재와 공포 정치에 반발하는 시위가 또다시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알시시 장관의 기자회견장에는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이집트 최고 종교 기관 알아즈하르의 수장인 아흐마드 알타이예브 대(大)이맘, 이집트 콥트교의 교황 타와드로스 2세 등이 참석했다. 이는 군부와 야권, 종교계가 무르시 축출과 새 정치 로드맵에 합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부의 실세로 떠오른 알시시 장관이 대통령 축출을 발표하자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과 대통령 궁 주변에 모인 수십만 명은 축포를 쏘고 환호를 질렀다. 이들은 “신은 위대하다” “이집트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상당수 시민은 4일 새벽까지 타흐리르 광장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눴다.

민주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통령을 1년 만에 군부가 나서 퇴진시킨 데 대해 이처럼 많은 시민이 환영하는 것은 무르시 대통령의 ‘이슬람 통치’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전했다.

알시시 장관은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하겠다. 대선과 총선을 조기에 다시 치르고 청년 대표 등이 포함된 국가통합위원회를 만들겠다”며 “아들리 알만수르 헌법재판소 소장을 새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알만수르 소장은 이튿날인 4일 헌법재판소에서 전격 취임식을 가졌다.

하지만 무르시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나는 선출된 대통령”이라며 군의 개입을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이를 규탄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군이 일부 세력만 대변해 명백한 쿠데타를 저질렀다”며 “저항의 집회를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국은 군부와 야권의 합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많은 국민은 무르시 대통령이 취임 후 이슬람 색채를 강화한 헌법을 만든 것과 부정부패는 해소하지 못하고 경제까지 어려워진 상황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이집트 군부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 한때 무르시 대통령과 동맹을 맺은 이슬람 수니파의 극보수 분파인 살라피그룹도 조기 선거를 지지한다며 무르시 대통령을 버렸다.

그렇지만 무르시 지지층과 보수 이슬람 세력이 총궐기를 할 경우 자칫 이슬람 세력과 세속·자유주의 진영 간에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인근 이슬람주의 ‘대부’ 조직인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뿌리 깊은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등 전국 각지에서는 무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슬람 세력과 반대하는 세속·자유주의 세력이 충돌해 하루 동안에만 최소 23명이 사망하는 등 4일간 5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군부는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쥐고 흔들려 하기보다 이집트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 및 서방 세력과 친한 엘바라데이 같은 인물을 내세울 것”이라며 “하지만 이집트 국민 사이에서 선거가 아닌 ‘광장을 통한 권력 교체’가 정당한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일단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을 받아들이고 군부의 조속한 민정 이양을 촉진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은 것으로 관측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일 성명을 내고 “군부가 신속히 움직여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정부에 모든 권한을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이집트에 제공되는 원조를 재검토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 현재 미국은 이집트에 연간 15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주로 군수물자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면서 군부 내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무르시 대통령 축출을 주도한 알시시 장관, 엘바라데이 전 사무총장이 꼽힌다.

파리=이종훈·워싱턴=신석호 특파원·김기용 기자 taylor55@donga.com
 

년전 혁명의 주역들, 민생 등지고 율법 매달리다 파국

동아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6면의 TOP기사입니다.A16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6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5 03:11 | 최종수정 2013-07-05 03:12 기사원문
 

이집트 무르시 대통령 축출로 최대위기 맞은 무슬림형제단

[동아일보]

무함마드 무르시 전 이집트 대통령(62)이 3일 군부에 의해 축출되면서 이슬람의 주요 세력인 무슬림형제단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1년 전 무슬림형제단은 자신들이 이끄는 자유정의당의 무르시 후보를 51.7%의 득표율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6월 30일 무르시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 반(反)무르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무슬림형제단도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이슬람 정치 규범을 강요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헌법 선언문을 내놓는 등 무르시 전 대통령의 행동 뒤에는 무슬림형제단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슬람운동 전문가인 카릴 아나니 영국 더럼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1954년 이후 무슬림형제단이 맞은 최대 위기 중 하나”라며 “이집트 정치 무대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1954년 무슬림형제단은 군 장교들의 리더로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해 불법 조직으로 규정됐으며 조직이 초토화될 정도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이슬람 학자인 하산 알반나가 일종의 이슬람 부흥운동 조직으로 이집트에서 창설했다. 이후 알제리 요르단 수단 등으로 세력을 넓혀 현재는 리비아 튀니지 등에도 조직을 두는 등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 중의 하나로 성장했다. 단체의 목표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지배하는 국가 설립으로 바뀌었다.

무슬림형제단은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하에서 폭력투쟁 노선을 포기하고 일정 수준의 정치활동을 보장받았다. 2005년 총선에서는 전체 하원 의석의 20%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학교와 병원, 공장 등 서민을 위한 복지 및 생계지원 시설을 운영해 노동자, 농민, 도시 저소득층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2011년 무바라크 퇴진 이후에는 의회(하원)에서 47%, 슈라위원회(상원)에서 58.3%의 의석을 확보한 제1당으로 성장했다.

일각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이 이 같은 경험으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알아람센터의 정치전문가인 무함마드 알사이드 이드리스는 “자유정의당이나 정치와 무관한 이슬람 자선단체로 활동하며 위기를 극복할 기회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편 3일 게하드 엘 하다드 무슬림형제단의 대변인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저항집회를 멈추지 않겠다”고 밝히면서도 “국민이 평화적인 변화를 원하는 만큼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높아 너무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역작용을 부를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부에서는 무슬림 무장세력이 산발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일 우려가 없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 AP통신은 “과격파 이슬람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아닌 폭력만이 그들이 꿈꾸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이뤄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이집트… 축출 주도한 알시시 국방장관, 美-英 유학한 엘리트 출신

동아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6면의 2단기사입니다.A16면2단| 기사입력 2013-07-05 03:11 기사원문


 

임시대통령 알만수르 헌재소, 정치적 성향 뚜렷하지 않아

[동아일보]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 축출에 앞장선 압둘 파타 알시시 국방장관(59)과 4일(현지 시간)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아들리 알만수르 헌법재판소 소장(68)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알시시 장관은 11개월 전 무르시 대통령에 의해 군부 수장에 올랐다. 영국 BBC 등 외신은 “알시시 장관이 이집트 정국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됐다”며 그를 집중 조명했다. 1954년 카이로에서 태어난 알시시 장관은 전형적인 엘리트 군인이다. 1977년 이집트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영국 합동지휘참모대와 미 육군대학원 등에서 유학했다. 정보 외교 계통의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무바라크 정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무관과 군 정보사령관 등을 지냈다.

무르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후사인 탄타위 국방장관의 후임으로 그를 지목한 것은 조용한 성품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순한 알시시 장관을 통해 군부를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등 독실한 이슬람 신자라는 점도 발탁 배경으로 꼽힌다. 알시시 장관은 2011년 반정부 시위 때 여성 시위대에 대한 군의 ‘처녀성 테스트’를 옹호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무르시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자 그는 예상과 달리 과감하면서도 신속한 결단을 내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당황케 했다.

알만수르 소장은 1992년부터 헌재 부소장으로 있다가 전임자의 사임으로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시위가 본격화된 1일 헌재 소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이집트 카이로대를 거쳐 프랑스 최고 엘리트 양성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그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부터 사법부에 몸담았지만 정치적 성향을 드러낼, 눈에 띄는 활동은 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집트 사법부의 판단은 법원 전체의 이름으로만 공표돼 판사 개인의 개별적 판결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 이집트 군부가 헌재 소장인 그를 대통령에 앉힘으로써 헌정 중단으로 받을 수 있는 비난을 피해 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조용한 성격도 임시 대통령으로 낙점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알만수르를 만난 적이 있는 미국 조지워싱턴대 네이선 브라운 정치외교학 교수는 “그는 상냥하면서도 과묵한 성격”이라며 “판사로서도 비대결적이며 타협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집트 군부는 권력 획득을 추구하지 않을 인물로 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허진석·이설 기자 jameshuh@donga.com


 

군부,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13-07-05 03:11

[이집트 무르시 대통령 축출]軍출신 대통령만 4명… 국가산업 45% 장악

[동아일보]

이집트 군부가 역사상 첫 민선 대통령을 축출하고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이집트 군부는 역사의 고비마다 정치에 개입해왔다. 이집트는 군부가 정권의 명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첫 단추는 1952년 군 출신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은 부패한 기존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아랍주의의 기치 아래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집트는 물론이고 사하라 이북부터 시리아 이라크까지 범아랍권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집트에선 이후에도 군 출신에 대한 신뢰가 깊어 ‘아랍의 봄’ 여파로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까지 4명의 군 출신 대통령이 나왔다. 그런 만큼 군 출신은 정관계 및 경제계의 요직을 차지하며 지배세력의 큰 축을 이뤄왔다. CNN방송은 3일 군 출신 인사들이 이집트 산업의 35∼45%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에 군부가 나선 것은 무슬림형제당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의 민선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군부는 특성상 혼란을 싫어하고 나라의 안정을 희구하는 세력인 데다 특히 이집트에선 가진 것이 많은 기득권 세력이어서 흔들리는 나라를 그냥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무르시 정부가 국가이념이랄 수 있는 세속주의에서 벗어나 이슬람 원리주의를 사회 각 부분에 도입하려 한 것도 군부로서는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나세르는 1950년대 후반 당시 갓 출범한 무슬림형제당을 탄압한 전력이 있다.

이집트 군부는 2012년 6월 민선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안보 및 국방 분야 등 총구 권력을 대통령에게 이양하지는 않았다. 군부의 개입 기미는 6월 23일 압둘 파타 알시시 국방장관의 발언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고 포린어페어스는 전했다. 당시 그는 “종파주의 다툼, 내전, 나아가 국가붕괴의 길로 빠지는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군부는 애국주의적이고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르시 대통령이나 야권은 이를 무시했다. 심지어 야권 지도자 함딘 사바히는 “(혼란의 와중에) 군부는 어디에 있는가”라며 군부의 개입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이번에 군부가 개입을 했지만 행보는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이집트 군부의 개입에 비교적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비록 군부의 쿠데타 성격이지만 이집트 국민이 원하는 무르시 퇴진에 군이 기여했다는 점에서 군의 개입을 비난만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윤양섭 선임기자 lailai@donga.com

 

나세르 이후 61년 만의 '군 거사' … 설계자 알시시 권력 핵

중앙일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5면의 TOP기사입니다.5면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5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05 00:57 | 최종수정 2013-07-05 01:49 기사원문


 

무르시 이후 이집트 정국 키맨은

만수르 대선 관리 임시대통령

엘바라데이는 야권연합 대표에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축출됨으로써 향후 이집트 권력의 향방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3일(현지시간) 무르시의 권한 박탈을 발표한 압델 파타 알시시(59) 국방장관이 현재로선 가장 큰 실세다. 알시시 장관은 1954년생이다. 그해 11월 14일 이집트 혁명위원장 겸 총리였던 자말 나세르는 혁명위원회 결의를 빌려 무함마드 나기르 대통령을 해임했다. 52년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왕정에 대항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 만이었다. 나세르 쿠데타 이후 61년 만에 이집트 역사상 두 번째 군부 쿠데타가 알시시의 손으로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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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시시 장관은 지난해 8월 무르시 대통령에 의해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출신인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군부 출신이지만 무르시 대통령이 속한 무슬림형제단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군부와 이슬람 정권 간의 새로운 연대를 전망하는 시각이 많았다. 지난해 말 이른바 '파라오 헌법'을 둘러싼 군부와 이슬람 정권의 갈등 때도 협상을 시도했지만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번 쿠데타 직전까지 무르시 대통령과 벼랑 끝 타협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집트 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알시시는 영국과 미국에서 전쟁·군사학을 공부한 유학파다. 군 정보 분야에서 이력을 쌓았고, 미군과의 교류를 통한 이집트군 현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정통 군 엘리트로서 알시시는 나세르로부터 이어지는 군부에 명예와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다. 이집트 경제의 상당 부분(수익 및 보유자산 15~40% 추정)을 차지한 군부는 오랜 무바라크 독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카이로 시민혁명 이후 '군부 타도' 같은 슬로건이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회자됐다. 알시시는 쿠데타를 통해 군부의 명예회복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이번 쿠데타는 표면적으로 군부가 시민혁명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2년 전 무바라크 정권 축출 때와 닮았지만 면면에선 크게 달라졌다. 군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임시 대통령을 세웠다. 지난 1일 헌법재판소 소장에 임명된 아들리 만수르(67)다. 군부가 쿠데타 이전에 사법부와 사전 교감을 했으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만수르 대통령은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관리형 지도자로 그칠 전망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만수르의 역할이 “1981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이 암살된 뒤 무바라크가 뒤를 잇기까지 8일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수피 아부 탈레브와 유사할 것”이라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타렉 마수드 부교수의 말을 전했다.

 알시시 장관의 TV 연설은 쿠데타이면서도 세속·자유주의 세력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함께함으로써 '민의의 반영'으로 보이게 애썼다. 이들은 군부와 물밑 조율 속에 향후 권력 분점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가장 주목받는 이는 무함마드 엘바라데이(71)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다. 20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무바라크 축출 때도 야권을 통합하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번 정국에서도 개헌을 통한 조기 대선·총선을 주창한 야권의 연합대표로 선출됐다.

 군부의 등장이 지난 대선에서 무르시와 결선을 다퉜던 아흐메드 샤피크(71)를 복귀시킬 수 있다. 무바라크의 최측근이었던 샤피크는 대선 패배 후 아랍에미리트(UAE)에 체류하고 있다. 무르시 정권에 의해 부패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공군 장교 출신의 정치인 함딘 사바히(72), 아랍연맹 사무총장이자 외교장관 출신인 아므르 무사(77), 온건 성향의 이슬람 학자이자 변호사인 셀림 알 아와(70) 등도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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