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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리더십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05
조회수
5,492
첨부파일
-
<창간 21주년 특집-역사를 바꾼 리더십>英 대처, 신념… 어설픈 타협 거부한 불굴의 여인, 영국病 치유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11-01 14:03 기사원문
 
 
일러스트=이정학 기자
마거릿 대처(87)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정치인도 없다.

어떤 이에게는 ‘영국병’을 치유한 영웅인 반면, 어떤 이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권좌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유럽정치의 거대한 산으로 버티고 있다. 이름에 ‘주의(ism)’가 붙은 정치인은 전 세계적으로 대처를 제외하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 그리스발 유로존 재정위기의 파장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현재, 온갖 저항을 물리치고 영국 경제, 사회 체질을 바꿔놓은 대처 리더십은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처는 ‘철의 여인’이란 호칭답게 11년 집권기간 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신념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보수당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체제를 극복하고 당수와 총리가 된 대처는 호전적인 노동조합을 제압하고 골병이 들어 있던 영국 노사관계를 재정립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탄광노조와의 대결로 인한 각종 노조들의 동맹파업으로 1년 넘게 국가적 혼란이 이어졌지만, 대처는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버텨 결국 노조의 자진파업 철회를 이끌어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로 경쟁력을 회복시켰고, 각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클랜드에 항공모함 2척과 구축함 7척 등 대규모 병력을 보내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처는 심지어 수감 중이던 북아일랜드 테러리스트들의 정치범 지위 요구 단식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아 결국 10여 명이 목숨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박지향(서양사학) 서울대 교수는 저서 ‘대처스타일’에서 대처 리더십의 뿌리를 ‘아웃사이더’에서 찾는다. 여성, 보잘것없는 배경, 급진적 정치사고의 소유자란 아웃사이더적 요소가 기성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밀어붙이는 힘이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목표의 명료함과 확고한 의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더해져 대처를 위대한 리더로 만들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대처는 화합의 지도자, 팀플레이어이기보다는 확신의 지도자, 단독 플레이어였다. 이런 면은 그의 집권말기 ‘독선’으로 치달아 정치적 몰락을 초래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대처 이후의 영국 경제는 심각한 양극화와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일정 기간 동안에만 정부 운영을 책임진 지도자가 아니라 10년, 아니 수세기 앞을 내다보며 나라를 변화시킨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오애리 선임기자 aeri@munhwa.com

<창간 21주년 특집-역사를 바꾼 리더십>브라질 룰라, 실용… ‘좌파 대통령’의 시장친화정책 경제 살리고 사회통합 끌어내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11-01 14:03 기사원문
 
       
   
   
 
“룰라 정부 시절에는 하나님도 브라질인이었다.”

경제평론가 브레세르 페레이라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66) 전 브라질 대통령 집권 당시 국민들의 자긍심이 이 정도로 높았다고 평가했다.

룰라는 대통령 집권 말기인 2010년 지지도가 87%에 달했을 정도로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전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존경받는 리더로 꼽히고 있다. 2002년 가난한 노동 운동가 출신인 룰라 전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국내외 여론은 그가 급진 좌파에 치우친 정치를 펼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뒤엎고 ‘실용의 리더십’으로 브라질 경제를 세계 8위로 성장시키고, 빈민을 구제하고, 분열된 정치도 통합했다.

그는 현실을 파악하고 실용적 전략을 펼치는 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막대한 부채와 국제 자본의 이탈로 인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좌파들이 요구했던 민영화한 기업의 재국유화, 외채 상환 거부 등을 외면했다. 그 대신 자유무역 등 시장경제적 기조로 기업과 외국 자본의 투자 환경을 개선시켰다. 국내총생산(GDP)은 2배 이상 증가했고, 1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이와 함께 그는 민중 정당인 ‘노동자 당(PT)’을 주요 정당으로 발전시키고, ‘볼사 파밀리아’라는 빈곤층 부조 정책으로 최저임금을 60% 인상하는 등 실질적인 분배 정책을 펼쳤다.

외교도 친미나 반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미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흥국들과의 연대를 통해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로서 지위를 격상시켰다.

국내 정치에서는 협상을 통해 인종, 이념, 계급을 뛰어넘는 사회 통합을 이끌었다. 물론 집권 당시 신흥국이 경제 호황을 누리는 등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룰라표 실용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현재의 브라질도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는 정치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현실에 맞는 브라질 모델을 추구할 뿐”이라고 답변했다.

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창간 21주년 특집-역사를 바꾼 리더십>中 저우언라이, 섬김… 낮엔 노동현장, 밤에 총리업무… 권위주의 경계한 ‘인민의 친구’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11-01 14:03 기사원문
 
       
   
   
 
“난세의 돌기둥(流中砥柱)이었다.” 중국 공산당 당사출판사는 2009년 1월 펴낸 근대 정치가 평론집 ‘중남해 인물춘추’에서 첫 인물로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전 총리를 다루며 이렇게 평했다.

저우는 중국 건국공신으로 건국 이래 27년간(1949∼1976년)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1898년 3월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당대 유명한 지주 학자 집안의 귀공자로 태어난 그는 1917∼192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프랑스 파리대 등에서 유학을 한 당대 드문 엘리트로 평생을 공산 혁명과 중국 건설에 바쳤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은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은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평이 있을 정도로 지금도 중국 안팎에서 가장 사랑받는 중국 정치인이다.

저우 전 총리의 어떤 면이 이런 평가를 만들었을까. 우선 많은 이들은 그의 ‘군자(君子)적 리더십’을 꼽는다. 1970년대 총리 시절 그는 노동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손이 터지도록 일을 한 뒤 노동자들이 자는 동안 총리업무를 봤다는 일화가 있다. 서양식으로 따지면 봉사와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서번트 리더십’의 전형인 셈이다. 평생 여섯 가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육무(六無)’의 삶도 그의 리더십을 대변한다. 저우 전 총리는 죽어 유언과 유골을 남기지 않고, 살아서 사조직을 꾸리지 않고, 후손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힘든 일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과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것은 저우 전 총리가 평생 실천한 서번트 리더십의 정수다.

저우 전 총리는 1976년 암으로 사망한다. 전날 밤 주치의 우제핑(吳介平)에게 남겼다는 “이제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말이 마지막 말이 됐다. 남긴 재산은 단돈 5000위안, 지금 환율로도 88만 원가량이다. ‘인민의 총리.’ 중국인들이 저우 전 총리 추념비에 쓴 그를 부르는 호칭이다.

베이징 = 박선호 특파원 shpark@munhwa.com

<창간 21주년 특집-역사를 바꾼 리더십>美 레이건 소통… 긍정의 언어로 ‘通’한 지도자, 침몰하던 美 재건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11-01 14:03 기사원문
 
 
일러스트=이정학 기자
미국 대선, 중국 지도부 교체, 일본의 조기 총선 가능성과 한국 대선까지 한국의 미래와 세계의 정치지형을 결정할 ‘정치적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에 미국과 유럽발 경제 위기까지 겹치면서 각국에서는 어느 때보다 위기를 타개할 리더십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결국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항목은 역으로 각국이 풀어야 할 과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명된 리더십과 이 시대의 숙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전면으로 불려나온 이들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파워와 번영, 그리고 소통.’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11∼2004)은 미 역사상 최악의 시기에 등장한 최고의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민에게 강력한 미국을 부활시킨 대통령, 경제적 번영을 일군 대통령, 그리고 위대한 소통의 대통령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004년 타계한 레이건을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 ‘보수주의자의 우상(icon)’으로 기억했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오른 1981년, 미국은 어둡고 우울했다. 인플레이션은 12.5%에 달했고, 실업률은 7.5%였다. 정부 재정지출 확대를 외친 케인스주의는 오일쇼크로 한계에 봉착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로 비틀거렸고, 이란 대사관 미국인 인질 사태까지 터졌다. 미국민은 방만한 정부와 탈출구 없는 경제에 점점 무기력해졌다. 곳곳에서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비관주의가 넘실댔다.

레이건과 미국민의 첫 소통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Are you better off now than you were four years ago)”라는 질문이었다. 그가 지미 카터 대통령과의 대선 TV토론에서 던진 이 질문은 국민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이어 국민들은 신발 세일즈맨의 아들로 태어난 B급 영화배우였던 69세의 레이건을 백악관으로 보냈다. 취임 초 레이건은 100일 동안 49차례에 걸쳐 의원 467명을 만나며 정치인들과 소통에 나서기도 했다.

레이건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지도자로도 통한다. 국민들에게는 긍정적 비전과 낙관주의를 심어줬다. 레이건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1989년 인플레와 실업률은 4.2%와 5.4%로 떨어졌다. 그는 작은 정부, 세금 감면, 규제완화로 표현되는 ‘레이거 노믹스’로 성장 동력을 부활시켰고 공화당의 정체성과 이념적 토대를 닦았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단호한 신념은 소련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왔고 통제의 장벽을 붕괴시켰다.

레이건의 소통은 언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재임 당시 불법 파업을 벌인 항공관제사 1만 명을 과감히 해고하는 등 행동으로 법을 지켜야 개인의 자유도 있다는 원칙을 심어줬다. 그는 지금도 “옳은 일은 결국 언제나 승리한다”는 묘비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워싱턴 = 이제교 특파원 jklee@munhwa.com

<창간 21주년 특집-역사를 바꾼 리더십>남아공 만델라, 포용… 친구는 가깝게, 적은 더 가깝게… ‘보복 대신 관용’ 인종차별 맞서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11-01 14:03 기사원문
 
       
   
   
 
넬슨 만델라(94)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은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이다.

인종주의에 맞선 자유 투사였던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선출된 뒤 흑인을 차별·억압했던 백인에 대해 보복하기보다는 화해와 통합의 리더십을 펼쳤다. 그의 이 같은 리더십은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남아공뿐 아니라 분열과 반목을 겪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에 리더십의 전범이 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차별 정책)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였던 그는 1962년 정부 전복 음모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 동안 로벤섬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생활해 결국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1985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별도로 정부와 협상을 추진하면서 내부로부터 ‘배신 행위’라는 의혹도 받았으나 “원칙은 변함없고, 시기상 지금이 협상의 적기일 뿐”이라고 설 작업을 벌여 신뢰를 얻었다.

그는 상대방의 것 혹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도 열심히 배우고 익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응용하려 했고, 이 점이 대화와 타협을 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 실제로 그는 1960년대 흑인들에게는 억압의 상징이었던 백인의 언어와 역사를 공부했다. 만델라는 이를 통해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고 이에 맞는 전술을 세울 수 있었으며 상대에게는 자신이 매력적인 협상 파트너로 어필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변호사이기도 했던 그는 수감시절에는 백인 교도관들에게 법률 상담을 해줬고, 누구든지 따뜻하게 맞고 선물을 주는 습관으로 ‘친구는 가깝게, 경쟁자(또는 적)는 더 가깝게’ 만드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990년 2월 석방된 이후 대화와 타협으로 대통합을 이끌어낸 공로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측근들로부터 “그간의 희생을 보상받아야 한다”며 종신 대통령직을 제안받았지만 과감히 이를 거절하며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박세영 기자
g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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