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1책 수다] 김욱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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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못 했지만, 박근혜는 할 수 있다!| 기사입력 2013-07-05 18:41[3인1책 수다] 김욱의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프레시안 김용언 기자] 2012년 대선을 앞둔 겨울, 법학자이자 서남대학교 교수인 김욱의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기보다 '대선후보들의 '사과''였다. 그는 곧장 책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의 압력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머리 숙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던 그 정치인들을 둘러싼 역학관계를 통해,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간적·정치적·역사적·이념적인 뭔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 결과물이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앤>(☞바로 가기 ) 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이권우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의 부제는 '박근혜·문재인의 사과가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정치가들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문제, 그리고 그 과오를 용서하는 문제를 다룬 책이지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이지만 사실 대중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되지 않은 주제를 저자 김욱 교수가 한 번에 써내려갔습니다. 저널리즘과 단행본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시사적인 주제를 단기간에 보도하는 저널리즘과 달리, 단행본은 그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파고들지요. 일본에서는 이렇게 능동적이고 빠르게 단행본을 펴내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에겐 아직 좀 덜 익숙한 경향입니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현우 : 제목에서 받은 인상보단 책이 훨씬 재밌었고요. 정치적 사과라는 단일한 주제로 한 권 분량을 죽 밀고 가는 힘이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생각만큼 책이 주목받진 못했다고 하니 아쉽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작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각각 사과했던 내용에서 촉발되어 책을 기획했다고 밝힙니다. 대선 전에 집필을 시작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쓴 책이고요. 한때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멘붕(멘탈 붕괴) 치유'라는 명목으로 흥행했었는데, 이 책 역시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그런 치유 성격에 좀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2012년 대선에 대한 다른 각도의 결산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당시 5.16쿠데타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사과는 크게 보도가 되었는데, 민주당 분당에 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어떤 면에서 의미 있는지 잘 이해 못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었고, 민주당 분당이 영호남 갈등의 중요한 열쇳말이었음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사과의 시작을 일제 강점기 청산, 즉 이광수와 최남선 등의 친일 작가로부터 시작하며 방점을 찍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 자체가 한국사회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박하게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의 장으로 존속되어왔음을 일별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가 사과했다 이권우 :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사과부터 먼저 얘기해볼까요.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는데요. 연좌제로 옭아매는 시대도 아닌데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해야 하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죠. 어쨌든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는데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이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본 분들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94쪽) 여기 대해 저자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일단 '5.16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며 그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요. 저자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현우 : 2012년 9월 24일이었죠.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대대적으로 보도됐을 때 분통을 터뜨린 극우주의자 조갑제의 반응도 인용됐는데요. '박정희가 만든 역사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만든 역사인데, 총체적으로 5.16과 10월 유신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박근혜 씨가 중대한 위기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위기다.'(168쪽) 조갑제조차 '박근혜 씨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이다"(169쪽)라고 폄훼할 만큼, 상당히 파괴력이 컸던 정치적 사과였다는 거죠.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정략적인 사과라 하더라도 모든 정치적 사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속내와 무관하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전리품이다, 그 의미를 계속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정치적 사과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더 잘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빚을 받으려면 빚을 줬다는 걸 기억해야 하잖아요? 저자의 결론처럼 궁극적으로 정치가 역사를 이길 수 없다고 할 때 그 역사의 승리를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이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저자의 실리적인 현실 분석과 평가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롭게, 배우는 심정으로 동감하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정치를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지치지 않는 민중에 대한 낙관적인 결론은 아직까지 확신이 가질 않습니다. 결코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던, 정치적 변화가 아무런 현실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자'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전두환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이현우 :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심신장애적 사과를 한 적은 있지요.(웃음) 김용언 : 네. 30년이 넘도록 그렇게 어떤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누릴 바만 즐기며 살고 있지요. 과연 역사가 정치를 이기는 것일까, 이 좁은 나라에서 지금껏 정치적·경제적 인맥이 촘촘하게 얽힌 채 서로의 이익 때문에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지속 중인데, 정말 거시적인 관점으로 조금씩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며 확신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우 : 2007년 당시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청문회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고, 유신은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완강한 태도가 2012년 바뀌었다는 거죠. 그게 저자 보기에는 나름대로 역사의 진보이자 역사의 힘을 보여준 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지요. 역사가 지그재그로 좌충우돌할 순 있지만 궁극적으로 진보할 거라는 신뢰, 저자인 김욱 교수 역시 그 같은 신뢰를 이야기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100퍼센트 객관적인 신뢰라기보다는 주관적인 결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역사가 승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권우 : 박근혜가 박정희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다수가 생각했었고, 설령 사과한다 하더라도 진정성이 있겠냐 하는 반응이 많았는데 그런 예상이 틀렸던 겁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과입니다. 102쪽에 보면 '민주주의 제도는 '모든' 정치인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로 강제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치인의 사과도 ''진성성 있는 마음과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거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사과 발언을 한 직후 부산시당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식에 참석해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춤으로써 진정성에 대한 공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저자는 그에 대해 '그녀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녀의 사과 언설이 그 자체로 역사의 전리품"이라고 못 박습니다. 일반적 관점과는 다르죠.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예도 있습니다. 2008년 쇠고기 협상에 반발하여 대대적인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아무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현안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봤어야 했습니다. 저와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21쪽)라고 사과했지만, 2010년 5월에 이르면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30쪽)면서 적반하장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죠. 이런 예들 때문에 정치적 사과에 대한 진정성이 늘 의심받으며 평가절하되긴 했습니다만. 이현우 : 보통 냉소적인 지식인이나 대중들은 정략적인 사과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받아들였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정치적 사과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걸로 우리가 계속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대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사과를 번복하려 할 때 우리가 계속 상기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필요한 거지요. 식민 통치에 대한 일본의 사과에 관련하여, 지금 자민당 정권에서는 과거의 공식적 사과 발언을 부정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사과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 무게를 느끼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는 역사적 기억 투쟁의 대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5.16쿠데타가 명백히 불법적이었으며 정통성이 없다'고 인정한 사과의 내용을, 그 사과 발언을 한 당사자의 진위와 무관하게 우리가 끝까지 충실하게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권우 : 45쪽 마지막 단락을 함께 볼까요. '정치적 사과는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역류할 수도 있다. 양심의 후퇴가 아니라 정치적 힘 관계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과를 받는 것보다 사과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집단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정치적 사과를 유효하게 하는 정치적 힘을 발휘해야 하는 거죠.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업적이나 과오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면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사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아버지 세대에 이뤄진 결과를 업적으로 칭송했고, 역사적 판단이나 사법적 판단에 대해서도 일반적 상식과 어긋나는 발언을 계속 해왔지 않습니까. 결국 정치적 힘의 균형 관계 속에서, 또 대통령이 되기 위한 지지율 상승을 위해서 진정성과 관계없이 아버지에 대한 정치적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현우 :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48.4퍼센트의 사람들에게 그나마 전리품이라고 할 만한 게 박근혜의 사과라는 겁니다. 이권우 : 만일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40퍼센트 이하였다면 사과를 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력균형이 상당히 팽팽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정치적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문재인도 사과했다 이권우 : 저자는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두고 '뜻밖의 사과'라 불렀고, 문재인 후보의 경우엔 '은밀한 사과'라고 칭했습니다.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던 모양이지요? 이현우 : 2012년 9월 27일 일이었는데, 크게 보도되진 않았어요. 당시 문재인 후보가 광주에 내려가 노무현정부 시절의 분당사태에 대해 사과한 부분을 책에서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관여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일(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이 참여정부의 큰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남에 상처를 안겨주고 참여정부의 개혁역량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우리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113~114쪽) 이 사과를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더라도 '문재인, 호남 찾아 '힐링 행보''라고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사과의 정치적 의미가 당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선 박근혜의 사과와 문재인의 사과를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어요. 이권우 : 김욱 교수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반(反) 민주당(분당)사태'라고 설명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문제 해결'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호남과 영남을 각각 지배하고 있는 상태'로서는 지역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새 출발한 당에 영남인들이 표를 찍어줘야'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법통'을 끊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민주당을 부정했다고 정리하지요. 동시에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을 청산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점도 있었고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통해 탄생한 참여정부가 호남의 민심을 배반했던 과거에 대해 문재인 후보가 뒤늦게 사과한 것입니다. 이현우 : 대통령이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섰던, 자신을 당선시켜준 정당과 과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시도는 굉장히 이례적이지요. 세계정치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법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 문재인 후보였습니다. 분명 그 분당사태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을 텐데, 바로 그 사람이 광주에 와서 그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한 겁니다. 지금 민주당 쪽에선 친노 세력과의 갈등 관계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요. 박근혜의 사과에 대한 조갑제의 반응과 달리, 문재인의 사과에 대해 친노 세력이 발끈하거나 흥분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실제로 친노들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문재인의 사과를 수없이 호남에 써오던 선거전략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사과는 마치 호남인들 귀에만 대고 속삭인 은밀한 귓속말처럼 들렸을 것이다.(200쪽) 이권우 : 친노 세력도 호남의 몰표 없이는 정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기 때문에, 노무현의 호남 홀대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자는 전반적으로 참여정부 친노 세력들에 상당히 비판적인 날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용언 : 아마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범위 바깥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그래도 지역감정을 다루는 이 부분이 다소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노무현의 지역감정 타파 노력이 '아마추어 정치'로 비춰질 수밖에 없던 거친 방식을 비판하고, 이런 식으로 호남으로부터 당연히 민주당지지 몰표가 나올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호남은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한다'(126쪽)고 주장하지요.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영남패권주의처럼, 한국에서 몇 십 년 동안 상처를 덧내왔던 호남 쪽 지역감정을 아예 인정하고 정치세력화하자는 주장일 텐데요. 박정희 정권 이후 차별을 수 십 년 동안 감내했던 호남 입장에선 당연한 주장일 수 있겠으나, 그 반대편인 영남의 기득권 제패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호남의 정치세력화 얘기를 하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현우 : 음, 저는 저자의 결론을 그렇게 보진 않았습니다만. 애초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었어요.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말입니다. 참여정부 당시의 해법이라는 게, 민주당을 지역정당으로 규정하고 소위 발전적으로 해체하려는 노력이었죠.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빠져나오면 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정치적 힘을 잃을 거라는 계산이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성공하기 힘든 시도였습니다. 그 패착이 참여정부 내내 정치적 행보의 발목을 잡게 됐죠.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연정 제안까지 하게 되는데…. 모르겠어요. 그게 노무현식 정치의 특징이었을 수 있겠지요. 진정성은 갖고 있지만, 현실성은 없었습니다. 어떤 정치학자가 노무현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불렀는데, 실상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마키아벨리스트의 전형이라면 올 초 개봉했던 영화 <링컨>에서 묘사되는 링컨 대통령 같은 사람이겠죠. 비록 링컨을 롤 모델로 삼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리더십은 서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걸 저자는 높이 평가하지요. 거기 대해 제대로 음미해야만 현재의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정치가 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권우 : 김용언 씨의 문제 제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121쪽부터 123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역감정'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친노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있는데요. 역으로 문재인의 사과와 노무현의 영남출신적인 사고가 호남을 더욱더 정치화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201쪽에 나옵니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개혁·진보세력은 호남몰표에 대한 위선을 벗고 다음 4가지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첫째, 진보세력은 호남몰표를 원하는가, 원치 않는가? 둘째, 만약 앞으로도 호남몰표를 원한다면 그것을 은밀한 위선적 요구가 아닌 공식적 선거전략으로 선언할 용의가 있는가? 셋째, 만약 앞으로도 호남몰표를 원한다면 호남인들이 무엇을 위해 특정 정당에 호남몰표를 줘야 하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다른 지역 유권자들은 당연히 계층적 이익을 위한 정책적 투표를 해야 하고, 호남은 '민주화의 성지'이므로 앞으로도 계층적 이익과 상관없이 도덕적 몰표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 그 답인가? 넷째, 만약 앞으로는 호남몰표를 원치 않는다면 공개적으로 (특히 선거에 임박해서) 새누리당에도 투표해야 한다고 계몽할 용의가 있는가? 호남 몰표는 광주 항쟁 이후에 나타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2012년 대선 당시 호남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 10퍼센트 가량 된다는 결과가 상징하는 바가 뭘까요. 호남으로 상징되는 차별에 대한 모순된 태도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개혁 정권 역시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1995년 12월, 김영삼정부가 전두환을 구속하자 이름 없는 대구 민초들의 이런 밑바닥 정서가 분출됐다. 그들의 불만인즉슨, '그래도 사람들 말이 전 전 대통령 때는 서민들 살기는 편했다 안캅니까' '전두환 씨가 잘못한 것이야 우리도 알지예. 하지만 모든 일에는 다 절차가 있고 방법이 있는 것 아입니꺼. 이 나라엔 법도 없어요?'(46쪽) 전두환이 나쁜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아들이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당시 대구 사람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박정희가 김대중과 맞붙었던 1970년대부터 교묘하게 지역감정을 활용하며 영남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음을 환기해보면, 박근혜 후보가 대선 직전 아버지의 과오를 반성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영남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영남패권주의의 근본이 무엇이냐를 물으면서 새누리당과 영남의 관계에 대해 더 파헤쳐야 하는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민주당과 호남의 관계에 대해선 저도 공감하고 있고요. 다만 영남 부분이 좀 더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현우 : 영남패권주의에 대해서는 덜 비판한 게 아닌가라고 하셨는데, 162쪽부터 164쪽까지 전두환에 대한 아주 시원한 평가가 이어집니다.(웃음) 전두환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에선 '새천년생명의 숲' 공원 명칭을 전두환의 아호인 '일해'로 변경했고, 그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에서 한때 '자랑스러운 동문 전두환 대통령 자료실'을 열기도 했던 에피소드들이 이어집니다. '대한민국 한쪽에서는 살인마·역적인 인물이 대한민국 다른 한쪽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면서 '지금도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 중"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사이즈가 큰 나라도 아니고, 전국의 대부분이 두 세 시간 거리잖아요. 역사적 평가가 이렇게까지 상반될 수 있다는 게 흥미롭지요. 팩트가 모호하면 이해나 갈 텐데(웃음), 역사에 대한 법적 판단도 내려진 상황에서 상이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게 정말 수수께끼지요. 저자는 ''5.18과 영남파시즘' 과거사의 진실을 철저히 드러내"고, '호남과 영남 간의 왜곡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전두환 일당' 대 '대한민국 국민' 간의 정의로운 대립"(164쪽) 구도를 만들어가야만, 그런 식의 프레임을 통해서만 지역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의 사과가 의미 있었던 거겠지요. 진보를 추상적으로 얘기하기보다,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진전되어 나가는 정치적 사과의 스텝을 밟아가자는 것이죠. 전두환에 대해서도 분명한 역사의 평가와 함께 정치적 책임을 묻고 사과를 얻어낼 수 있는 압력이 가해져야 합니다. 전두환으로부터,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심신장애적 사과'(웃음) 이후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잖아요. 너무 유명한 '29만 원' 발언은, 그야말로 대국민모욕이죠. 이명박 정부도 그렇고, 지금 속속들이 공개되는 국정원의 행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정치적 사과가 정치적 진보에 대한 유력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아직 우리의 역량이 부족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이권우 : 이 책을 통해 우리 정치는 지역주의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김욱 교수의 전작을 보니 <영남민국잔혹사-'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개마고원 펴냄)가 있던데, 아마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상대적으로 좀 덜 다뤘던 영남패권주의가 더 정밀하게 다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누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이권우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 나온 또 다른 사과의 사례 중에선 어떤 것이 가장 흥미로웠는지 얘기해볼까요. 이현우 :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무조건 사면'하자는 입장으로 돌아섰을 때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 당시 분격하여 김대중의 최대 실정이라고까지 생각했었어요.(웃음) 저자의 프레임에 따르자면, 정치적 사과는 개인의 사과와 다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의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용서한다고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과와 용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김대중은)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화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며 '그분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주장한다.(226쪽) 한편으로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되어 본인도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했다는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조차 개인적인 차원과 정치적 사과를 구분하지 못했던 오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권우 : 정당들의 지역적인 토대, 지지 세력의 한계가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하여 정권을 이뤄냈기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이라든가 영남권의 지지를 위해서 그들을 사면했다는 얘기도 있었지요. 그런 오판에 대한 평가가 책 39쪽에 잘 나옵니다. 정치적 사과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문제고, 감정의 문제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며, 과거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문제라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아예 사과를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사과 없는 용서로 대체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적 패배를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크다. 그것이 끈질기게 정치적 사과를 요구하는, 또 요구해야 하는 이유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사과와 용서 문제로 넘어가게 되네요. 이현우 : 당시 사면에 관한 <경향신문> 기사 아래 김욱 교수가 코멘트를 첨부한 게 있습니다. '정치인의 사죄와 용서는 개인의 그것과 다르다. 김대중이 베푼 '사죄 없는 용서'는 개인 차원에서야 아름다운 일일지 모르지만 정치지도자로서 역사적 상처 치유라는 과업을 저버린 크나큰 과오였다.'(38쪽)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때 사면을 하지 않았다면 '29만원' 같은 발언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1600여 억 원에 달하는 전두환의 미납추징금 환수 문제가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전두환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집약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가에서 5.18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지정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반대편에선 그 학살의 당사자가 호의호식하며 심지어 육사 졸업식에서 사열까지 받는 기형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단계는 정확한 비판이라고 봅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오판이 주변의 정황상, 국정의 안정적인 운영상 불가피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해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나 리더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와 용서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 정치적 사과와 용서의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정치가를 갖기 위해서 국민이 먼저 그 부분에 대해서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권우 : 이현우 선생님이 정치하면 되게 세게 할 것 같아요. 이현우 : 아, 로베스피에르 같은…(일동 웃음) 김용언 : 저도 전두환·노태우의 사면에 대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까지 보았던 한국 대중문화에서 그 같은 용서와 사과의 문제를 가장 잘 포착한 장면이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였어요. 재벌의 딸이자 운동권 학생인 혜린(고현정)이 연인 태수(최민수)를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린 아버지 윤회장(박근형)에게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라고 선언하자, 아버지가 '용서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입니다. 어린 시절 그 문장이 되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뭘까, 아, 결국 이런 건가하는 생각을 내내 했었어요. 강한 자에 대한 이상한 경외심과 굴복감이 아직까지 한국 현실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요. 밋 롬니 부분이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는데요. 2012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밋 롬니가 <위대한 미국은 사과하지 않는다>(김기용 옮김, 예지 펴냄)를 쓰기도 했지요. 그는 '미국은 실수도 했다. 하지만 의롭다고 믿는 훌륭한 일들을 해왔고, 미국의 선조들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평화를 얻기 위해 희생을 치렀다. 이런 미국을 대신해서 사과를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132쪽)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극우 현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극우들의 논리가 '강한 일본을 보고 싶은데 왜 항상 사과만 하냐, 언제까지 사과만 해야 하냐'잖아요.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경우가 먼저 떠오릅니다. 이분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잖아요. 전두환 등으로 상징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해선, 그들이 성자의 위치에까지 올라야만 가능한가 하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피해자의 용서, 화합과 평화, 이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건 아닌지…. 김근태 전 상임고문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는 부분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같은 악마를 용서했다더다'라는 점이잖아요. 그런 식의 '성자'같은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불쾌합니다. 이권우 : 한국의 진보가 갖는 어려움이 그 점이지요. 도덕적인 완벽성을 요구받기 때문에, 어떤 허점을 보이기만 하면 시민적 지지를 잃어버려요. 보수 쪽의 실수에는 상당히 너그러우면서, 진보의 윤리성에 문제가 생길 때는 끝까지 비판하게 되니까요. 김용언 : 지역감정과 더불어 거기서 파생되는 '강한 권력'에 대한 매혹이 만연한 상황이 정말 끔찍합니다. 이현우 : 그게 바로 미당 서정주의 세계관이잖아요. 김용언 : 전 이 책에서, 전두환의 56회 생일(1987년)에 바치는 서정주의 시 '처음으로'를 읽고 진심으로 충격 받았습니다. 그런 시까지 썼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이권우 : 139쪽에 수록된 시지요.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김용언 : 지난 5월에 한국시인협회가 엮은 시집 <사람>(민음사 펴냄)도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가 결국 전량 회수됐잖아요? 박정희, 이승만, 이병철 등에 대해 낯 뜨거운 찬양을 바친 시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이현우 : 미당 학교에서 배출한 시인들의 계보인 거죠.(웃음)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친일파 작가 이광수나 최남선의 자기 변명은 정말 말도 안 됩니다. 그나마 자신의 친일행적을 공개적으로 속죄했던 유일한 인물이 <매일신보> 사장 최린 정도예요. 이런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는 경험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는 게, 오늘날의 아주 많은 병폐와 정치적 냉소주의와 극우 득세의 바탕이 아닌가 싶어요. 미당 서정주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어린 권력자에게 저런 낯 뜨거운 찬양시를 바쳤지요. 책 142쪽에 보면,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서정주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린 부분에 매우 공감합니다. '서정주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야말로 그의 가련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인 삶을 비추는 적나라하게 맑은 거울들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의 일생을 통한 권력지향과 정치적 노예성을 살짝 도포(塗布)하는 언어가 그토록 공교롭다는 것에 아이러니컬한 경이감을 느낄 뿐이다.' 김용언 : 거의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느끼게 됩니다. 한국어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시를 지은 사람의 실제 모습이 이런 거였다는 게…. 이현우 : 그걸 그대로 교육해야지요. 이 언어의 아름다움이 어떤 정치적 몰상식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게,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권우 : 맞습니다. 세계문학사에 기록된 소설들만 봐도, 가장 미학적인 작품이 가장 윤리적인 작품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만 유독 윤리성과 미학이 상당히 충돌하고 갈등을 겪는 듯, 미학에선 윤리를 포기하는 것 같은 경향이 있어요. 서정주나 그의 시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서정주)의 삶과 시 모두는 차라리 과잉 정치적이었다'라는 김명인 평론가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올바른 문학, 좋은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훈련과 교양을 위해 제대로 교육해야 하는 게 필요해요. 힘과 윤리를 동시에 이권우 : 국내의 사과 문제를 주로 얘기하다보니 일본의 경우를 뺐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지요. 저자의 평가에 대해 같이 얘기해볼까요. 이현우 : 책 56쪽부터 58쪽까지 일본의 과거사 사죄발언에 대한 서술이 죽 나오지요. 최근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 사죄를 부정하려는 듯한 발언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데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정치적 사과는 역학관계에 의해 재규정되고 번복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정치적 사과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거죠. 정치인들의 경우 자기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지지기반이고 정치적 발언을 정당화해주는 힘이기 때문에, 정치적 사과에 대해서 번복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도 자기기반과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해요. 일본의 망언이라는 것도 주기적으로 듣게 되는데,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로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작년 말 도쿄 도지사를 사임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의 망언도 마찬가집니다. 한번 발언했는데 지지율이 올라가면 계속 망언을 내뱉는 것이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합니다. 망언 자체가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사이의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를 봐야 합니다. 도덕적 차원에서만 자꾸 판단하는데, 정치적 사과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이권우 : 이 책에서 설명하다시피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발언은 '미야자와 담화'(1982년),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1998년)입니다. 이런 발언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흥미로워요. 57쪽을 보면 '사과 없이 자신들의 뜻대로만 국제관계를 영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못 박지요. 아시아 주변국들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일본으로서는 과거사보다 미래의 이해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현우 : 우리가 그런 망언들에 발끈하는 건, 국가라는 행위자를 개인과 동일시하면서 심성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시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일본의 사과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을 벗어난 역량이 필요합니다. 김용언 : 이순간의 현실을 생각하면 무척 갑갑해집니다. 그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외교와 역사 부문의 전문가집단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텐데, 이 책 134쪽에 나오다시피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아주 놀라운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친밀인명사전> 수록인물 4776명의 이름이 공개되었을 때,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일본도 용서하는데…,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할 것 같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위해-인용자 주) 과거에는 단어 한 마디, 사과라는 단어 한 마디로 몇 달씩 조율을 했지만, 이번에는 사과는 당신들(일본)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지도자라는 인물의 대표적인 천박성, 그리고 옆에서 그걸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 전문가집단을 현명하게 중용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폐단의 전형이지요. 앞으로도 만약, 일본에게 그 같은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 게 한국에 소위 이득이 된다면,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으로 그런 과거사를 덮고 가도 된다는 파국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전 양쪽이 함께 가야 하는 것 같아요. 역량을 키움과 동시에 역사적 윤리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높여야 합니다. 이권우 : 물론 사과와 용서가 맞물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사과하면 무조건 용서해야 하나? 이현우 : 아까 <모래시계> 얘기가 나왔는데, 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강자가 용서합니다. 적어도 어떤 차원에서건, 힘의 강자든 도덕적인 강자든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지요. 한국인의 심성이라고 하면 오버일 수 있는데, 어쨌든 많은 이들이 감동에 기대지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데올로기, 화해의 이데올로기. 전 그런 부분이 불만스러운데, 용서에 대해서도 그게 마치 궁극적인 해결책이자 결론인 양 얘기하는 경향이 불편합니다. 이권우 : 만일 광주항쟁을 무력 진압했던 전두환 세력이 사과하면, 용서될 일인가요? 이현우 : 누가 용서해야 할까의 문제인데, 아주 어렵습니다. 일본의 과거 침략 발언도 그렇고요. 어느 정도까지 사과하고, 누가 용서해줄 것인가의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이권우 : 한갓 인간에 불과한데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니…. 이현우 : 사실 용서라는 게 되게 오만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복수예요.(웃음) 지젝의 책에 나오는 말이기도 한데, 용서는 신의 자리를 참칭하기 때문에 늘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김용언 : 게다가 사과와 달리 용서에는 진정성이 강요되지요.(웃음) 이권우 : 사과는 정치적 문제고 용서가 진정성의 문제라면, 우리 사회가 정치적 사과에 대한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과할 건 사과하고, 거기 대한 논란과 논쟁은 거쳐야 합니다. 갑자기 용서를 들이밀면서 정치적 사과를 안이하게 해결하는 측면이 분명 있지요. 이현우 : 저자 결론을 정리해 본다면, 용서에만 초점을 맞추는 걸 재고해봐야 하고 정치적 사과를 요구하는 역사의 힘을 우리가 길러야 하며, 냉소주의 대신 그 역사적 힘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전 그런 결론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를 마치며 이권우 : 슬슬 정리해야 할 시점인데요.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을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저로서는 단일한 주제로 책 한권을 소화하는 필력, 이슈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강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현우 : 좋은 책의 조건 중 하나라면,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하도록 하는 책이죠. 저한테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가 의미 있는 책이었습니다. 뭐랄까, 말투 자체는 논객식 글쓰기예요. 진중권식 글쓰기와 강준만식 글쓰기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자료와 주장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았고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측면에서 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언 : 저 역시 이 책의 장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요. 조금 아쉬웠던 점을 한두 가지 첨언한다면, 아까 말했다시피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분석도 포함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 저자는 '화해강요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개신교 프레임인데,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이런 프레임과 결부되면서 심화되는 것인가 하는 추측도 들고요. 이를테면 섣부른 용서가 어떻게 끔찍한 파국을 가져오는가를 다루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 같은 영화와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자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을 논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권우 :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달에 또 다른 '납량특집' 책으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