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메인이미지
top버튼

자유게시판

Home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VIEW

“실수도 스펙 부딪치다 보면 성공할 테니 그냥 해~”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08
조회수
4,928
첨부파일
-

“실수도 스펙 부딪치다 보면 성공할 테니 그냥 해~”

중앙SUNDAY| 기사입력 2013-07-07 04:03 기사원문
 
조용철 기자

정대세. 북한 축구대표팀 선수 얘긴가 싶겠지만 연예계에 또 한 명의 정‘대세’가 있다. 수년째 FM 라디오와 공연무대를 평정하고 있는 ‘컬투’ 정찬우(45). 그가 김태균과 진행하는 ‘두시탈출 컬투쇼’는 7년 연속 청취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17년간 2200회를 넘긴 공연도 누적 관객수 180만 명을 기록하며 매진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기꺼이 파란만장하시라는 책을 펴냈다. 스타들의 흔한 성공 스토리 대신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통해 2030 젊은이들에게 ‘돌직구 인생법’을 던져주고 싶었단다. 4일 저녁 팬사인회를 마친 그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마주 앉았다.

이모부인 유제두 권유로 입대 결심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책 낼 생각은 원래 없었다. 이런저런 제안도 많았지만 내 생각을 글로 쓴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올 초 취업 경쟁에 힘들어하는 청년세대에게 고민 상담을 좀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나의 솔직한 조언이 힘이 될 것 같았단다. 2030에게 도움이 된다면 뭘 못하겠나 싶었다. 대신 나는 글재주는 없으니 말을 할 것이고, 그걸 잘 적어줄 사람을 데려와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구술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책에 밝혀 달라고 했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생각이 좀 달랐다. 주류와도 거리가 멀었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해줄 말이 있을 듯싶었다.”

 -글을 써보니 어떻던가.

 “여태까진 남을 웃길 생각만 했는데 이건 여러 질문을 통해 내 생각을 끌어내는 작업이었다.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었고, 초고를 보고는 바로 오케이했다. 더 꾸밀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꾸며져서도 안 되고. 근데 되게 쑥스럽더라. ‘정찬우는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싶은 생각에 괜히 오그라들고(웃음).”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힘들었다고 했다. “20~30대 땐 잘 몰랐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힘들어졌다. 내가 뭘 하고 사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건가 회의도 많이 들었고. 사람들은 컬투가 많은 걸 이뤘다고들 생각하는데 돌아보니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지금은 잘나가지만 냉정한 연예계에서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썰물에 싹 쓸려 내려가면 어떻게 돼 있을까. 고민이 밀려왔다. 아들이 중2인데 마치 내가 중2병을 앓는 것처럼.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됐고,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늘 기세등등할 것만 같던 그의 고백은 예상 밖이었다. 그의 얘기는 아버지로 이어졌다.

 “한량이면서도 멋있는, 내겐 종교와도 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사업이 초대박 나던 1987년 겨울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셨다. 집안은 엉망진창이 됐다. 화불단행이라고, 그 무렵 술자리에서 절친이 맞는 모습을 보고 생전 처음 주먹을 날렸는데 상대방이 쿵 하고 쓰러졌다. 아버지도 뇌를 다쳤는데…, 무서웠다. 바로 도망간 뒤 6개월간 학교도 못 가고 막노동판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의 이모부는 70년대 권투계 풍운아였던 유제두 전 세계챔피언. 당시 수도방위사령부 코치로 있던 유씨는 그에게 수방사 입대를 권유했다. “90년 초 지원서를 냈는데 술자리 사건이 불구속 수사로 이어진 게 문제가 돼 탈락했고, 결국 가장 힘들다는 수색대로 배치됐다. 신병교육대 2주차 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무의식 중에도 딱 한마디는 했는데 바로 ‘찬우야’였다. 이 말을 매일 하셨다. 1년 반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나셨지만 (정신연령이) 6세 수준이었고, 내가 군대 가니까 저를 찾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단다. …내겐 너무 가슴 아픈 기억들이다.”

 군대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던 때였다. 말 한마디 않고 지냈다. 어느 날 문선대 공연이 왔는데 ‘일병 선임 누구야’라는 호출에 덜컥 장기자랑 대표로 뽑혔다. 휴가 보내준다길래 미친 듯이 했더니 1등을 했고, 얼마 뒤 문선대로 차출됐다. 아, 내게 이런 끼가 있었지 싶었다.”

 -어렸을 때 개그맨 되겠단 생각은 안 했나.

 “웬걸, 중2 때까진 꿈이었다. 정말 나는 남을 웃기는 데는 천재인 줄 알았다(웃음). 배우지도 않았는데 다섯 살 때부터 전국 8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썼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싸우지 않았으면 수색대 안 갔을 거고, 그럼 문선대도 못 갔을 거고, 묻혀 있던 끼도 못 꺼냈을 거고. 처절하게 괴로웠던 사건들 때문에 운명처럼 개그맨이 된 셈이다. 안 좋았던 기억들이 지금 이 자리를 있게 해줬고, 그때의 쓰라린 고통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돌직구 유머, 불친절한 유머는 천성인가.

 “일부러 컨셉트를 잡은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행히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 하지만 초창기엔 건방지다는 말 숱하게 들었다. 젊은 애가 너무 말을 막 한다는 거다. 라디오도 우리가 좀 더 어렸으면 절대 이렇게 못한다. 우리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나마 먹히는 것 아니겠나. 사실 난 연예인이 된 걸 정말 후회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런 인생 살 줄 알았다면 선택 안 했을 거다. 물론 무대 위에선 더없이 행복하고 짜릿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되겠나. 나머지 시간은 온통 발가벗겨진 삶을 살아야 한다.”

 그는 그러면서 슬픔을 얘기했다. “전에는 사람들 웃기려고 ‘노력’을 했는데 어느새 ‘기술’이 돼 있더라.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 나면 웃기기 힘든 게 정상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세 치 혀로 웃기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웃고, 좋아하고…. 슬펐다. 이런 내가 정말 싫었다. 올해 특히 그랬다.”

 -요즘도 그런가.

 “지금은 꽤 괜찮아졌다. 매년 공연하느라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었는데 지난달엔 휴가 내고 여행도 다녀왔다. 이번에 마음에 새긴 말이 하나 있는데 ‘이 또한 지나가리라’다. 물론 파도는 또 오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쉽게 이겨낼 수 있지 않겠나.”

서른은 넘어야 남을 웃길 수 있어

-정찬우만의 웃음 철학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감동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내 모든 인생을 쓸어 담아 목젖을 통해 뱉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른은 넘어야 남을 웃길 수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잘 웃길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내가 자유로워져야 남을 웃길 수 있는 법이다. 예전엔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했는데 40대 중반이 되니까 드디어 필터링이 되기 시작하더라.”

 -그럼 ‘정찬우다움’을 잃어가는 것 아닌가.

 “나의 센 이미지가 그렇게 조금씩 줄어드는 것조차도 정찬우이기 때문인 거고. 계속 직설만 하면 나이 먹은 정찬우가 아니지 않겠나.”

 -공연이 늘 매진되는 비결이랄까.

 “(갑자기 예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 그건 잘하니까 몰리는 거다(웃음). 공연을 보신 분들은 안다. 우리 공연이 왜 잘되고 인기가 있는지.”

 -가족들에겐 잘하나.

 “한 50점? 절반 아빠지만 늘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한번은 방송 나가서 ‘아내는 70점’이라고 했다가 혼쭐난 적이 있었다. 근데 세상에 100점짜리가 어딨나. 나는 70점이면 만점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다. 솔직해서 욕 먹고. 그 뒤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상처받는다면 안 해도 될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후배 개그맨 양성에 치킨까지. 사업도 활발한데 연예인과 사업가, 뭐가 더 맞는 것 같나.

 “솔직히 사업 쪽이 더 좋다. 맞기도 더 맞고. 근데 능력은 연예인 쪽이 더 있는 것 같고, 하하하.”

 -앞으로의 꿈은.

 “정말로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사회적으로 이렇게 사랑받았으니 그 이상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나.”

 -이 책에서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실수도 스펙이다. 그러니 기꺼이 파란만장하시라. 책 제목도 내가 직접 골랐다. 성공한 사람치고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나. 근데 모두 실패를 두려워만 한다. 핵심은 이거다. ‘그냥 해~’. 그렇게 부딪치다 보면 실패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겠지만 언젠간 성공할 테니.”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