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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은 내가 짊어지고 갈게, 한국 친구들한테 잘해줘”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08
조회수
5,390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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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은 내가 짊어지고 갈게, 한국 친구들한테 잘해줘”

한겨레| 기사입력 2013-07-07 11:05 기사원문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팜티호아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 이 르포를 쓴 구수정씨는 1999년 가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취재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인물입니다. 1968년 2월 벌어진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마을 학살에서 두 다리가 잘린 채 살아난 팜티호아 할머니의 사연은 그중 하나였지요. 15년간 할머니와 수없이 만나 속깊은 이야기를 들었고, 지난 6월16~19일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도 지켰습니다.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사회적 기업인 아맙(cafe.daum.net/doanhnhanxahoi/)을 이끌며 한국-베트남 평화운동의 가교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팜티호아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비는 스님의 독송 소리가 마을 어귀까지 울려왔다. 가슴이 내려앉고 발이 땅에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왔네, 왔어!” 조붓한 고샅길에 웅그리고 앉아 있던 동네 사람 몇몇이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먼 데서 온 제살붙이를 반기듯 살가운 눈인사가 오가고 한국의 단체들이 보내온 근조 화환이 줄을 이으면서 장례식장은 일순 부산스러운 활기를 띤다. 빈소에 차려진 제단에 향 3개를 피우고 두 번 절을 올렸다. 당신이 토했을 마지막 숨이 연기처럼 흩날리는 향불 뒤에서 영정 속의 할머니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 말이 없다. 빈소를 물러나는데 하미 학살의 또다른 생존자인 쯔엉티투 할머니가 발목에서 뭉툭 잘려나간 다리를 절룩이며 화환마다 향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근조 문구 한자 한자를 몇 번이고 되뇌면서. “이제는 전쟁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할머니가 우리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사랑, 평화로 꽃피우겠습니다”….

미군에 이어 한국군 청룡여단이 들어온 뒤…

그날 아침, 할머니의 얼굴에는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지난겨울부터 줄곧 병원 신세를 지며 다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맏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저 멀리 호주에서 몽매에 그리던 둘째 아들도 날아왔다. 또다시 자식을 먼저 앞세울라 노심초사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말문까지 닫았던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어 십수년 만에 한자리에 마주 앉은 형제에게 조곤조곤 이르는 말도 길게 이어졌다. “과거의 원한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 거야. 그러니 나 없어도 한국 친구들이 찾아오거든 잘 대해줘.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제 그만 미워하라고 해. 그 불쌍한 것들…. 한국에서 위령제도 와 주었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나도 위령비 비문이 덮이는 걸 누구보다 반대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는 저것을 이제 와 어쩌랴 싶고…. 한국 애들 여기까지 와서 마음 다칠 거 생각하면 이대로 둔들 또 어떠랴 싶고….”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당부가 될 줄은 몰랐다. 하루에 죽 두어 술 뜨기도 어려웠던 할머니는 그날 둘째 아들이 떠 넣어주는 미음 한사발을 깨끗이 비웠다. “너희들도 배고프다. 어서 밥 먹어라.” 가족들이 막 밥상 앞에 둘러앉았을 때 ‘쿵쿵’ 침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 건너가 보니 할머니가 가쁘게 마지막 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2013년 6월16일 낮 12시40분, 팜티호아 할머니는 향년 87살을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생애 처음으로 편안히, 정말 편안히 깊은 잠에 든 할머니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풀지 못하고 간 수수께끼는 1968년 운명의 그날, 친절하고 다정했던 한국의 청년들이 왜 하루아침에 살기로 번득이는 붉은 눈의 야수로 돌변했는가 하는 것이다. 1965년 3월 미국 해병대 제3상륙부대가 다낭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호아방 현과 디엔반 현을 점령한 해병대는 1966년 봄 하미의 해안에 있는 프랑스의 옛 꼰닌 기지를 접수한다. 미군들은 신속하게 주변 마을을 평정하기 시작했고, 하미 사람들은 ‘전략촌’이라 불리는 호이안의 난민촌과 다낭의 빈민가로 소개되었다. 그 뒤 1967년 12월 미 제5해병연대는 꼰닌 기지를 한국 해병대인 청룡여단에 인계한다.

오랜만에 두 아들과 모인 날

할머니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한국에서 위령제도 와 주었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것이 마지막 말일 줄 몰랐다

마지막까지 못 푼 수수께끼는

친절하고 다정한 한국 청년들이

왜 1968년 2월25일 오전에

마을 사람 135명을 죽였는지…

주검마저 불도저로 밀었는지…

두 아이와 두 다리 잃게 했는지…


하미 사람들은 식량도 부족하고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난민촌의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궁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죽어나가자 마을 노인들은 남베트남 당국과 한국 전투 지휘부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한다. 허가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하미 사람들은 1967년 12월 말에 마을로 돌아갔다. 당시 하미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군인들은 재정착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과 건축 자재를 지원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주민들은 청고추 같은 지역 산물을 군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학살은 그 뒤 한 달쯤 지난 1968년 2월25일에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하미 사람들은 그날 마을을 유린한 군대가 학살 전에 자기들을 도와준 부대와 같은 군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학살 직전에 부대 교체가 있었든지, 아니면 적어도 그 부대의 군인들은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1999년 필자가 처음 하미 마을을 찾았을 때도 할머니는 한국군들이 왜 갑자기 학살을 자행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며 가슴을 쳤다. “한국에 가거든 제발 높은 양반들에게 좀 물어봐줘. 왜 우리 같은 무고한 양민들에게까지 총질을 해댔는지, 대체 왜 갓 태어난 젖먹이까지 죄다 쏴 죽여야 했는지….” 하미의 생존자들에게 그날의 학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역사의 봉인이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원숭이해인 1968년 정월 스물넷째 날, 양력으로는 2월25일 오전 9시30분, 한국 해병대는 하미의 작은 마을인 썸따이 들머리에 탱크와 장갑차를 세워두고 세 방향에서 마을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께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응우옌 씨네 등 각기 다른 세 지점에 모았다. 생존자에 따르면, 지휘관의 길고 장황한 연설이 이어지고 일부 병사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하미 사람들은 한국 군인들이 주민을 한데 모은 것은 식량을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중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은 또 무엇을 나눠주려나 머리를 굴리며 지루한 연설을 참아내고 있었다. “어젯밤 내가 죽은 이의 머리맡에 달걀인지 오리알인지를 놓고 제를 지내는 꿈을 꿨어. 왠지 오늘은 불길해.” 팜티호아 할머니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밤 꿈 얘기를 털어놓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지휘관이 연설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을 등진 채 몇 발짝인가 걸었을 때였다. 장교의 손짓을 신호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M60 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서른 가구 남짓의 주민 135명을 학살하고 집집마다 불을 놓아 온 마을을 초토화하는 데는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 아이들의 몸을 감싸며 땅 위로 바싹 엎드렸다. 첫 번째 수류탄은 할머니의 허리를 맞고 튕겨 나갔고 두 번째 수류탄이 할머니 발밑에서 터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의식도 아득해졌다. 학살이 끝나고 몇몇 생존자들은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돗자리로 시신을 둘둘 말아 얕게 판 구덩이에 묻고 작은 돌멩이나 막대기로 표시를 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한국 군인들이 D-7 불도저 2대를 끌고 다시 마을에 들어와 엉성한 무덤들을 짓밟고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마저 밀어버렸다.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두 번 죽임을 당했다”며 시신과 무덤까지 훼손한 이 사건을 한국군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로 기억한다. 베트남 쪽의 자료에는 “커다란 대나무 채반과 긴 나무젓가락을 들고 흩어진 뼛조각과 살점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당시의 참혹했던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그날 학살로 할머니는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짜리 아들, 그리고 한집에 살던 사촌올케와 뱃속의 아기, 아직 어미 젖을 떼지 못한 젖먹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까지 세 명의 종질을 잃었고 자신도 수류탄에 두 발목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만삭이던 사촌올케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끝내 죽임을 당했는데 배가 갈라져 태아와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열네 살이던 할머니의 맏아들 럽은 다낭에 머슴살이를 가 있었고 열한 살이던 둘째 아들 틴은 호이안에서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고 있어 학살을 면했다. 가족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럽은 황무지로 버려진 땅을 개간하다 불발탄에 두 눈을 잃어 장님이 되었다. 가난에 진저리를 치던 틴은 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떠나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나도 어느 글에선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던가. 살아남아 ‘생존자’로 불리었던 할머니는 “목숨이 붙어 있다 뿐이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며 도리질을 치곤 했다. 그래도 산목숨은 또 살아야 해서 비럭질까지 나서야 했던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는 유족들도 그의 영정을 부여잡고 울부짖는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군들은 시신과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도 모자라 마을까지 깡그리 쓸어버려 하미를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 모래밭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병사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부상자들을 야영지의 막사 같은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총상으로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온 사람, 배에서 창자가 비어져 나온 사람, 수류탄에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 등 썩어가는 육신이 내뿜는 악취가 진동을 하던 그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나환자촌’과도 같았다고 할머니는 전한다. 거기에는 의사는커녕 약품도 없었고 그 어떤 치료도 없었다. 할머니의 잘린 발에도 구더기가 하얗게 슬어 가슴까지 꼬물꼬물 기어올랐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전신에 총상과 파편상, 화상까지 입은 어린 딸의 신음소리였다.

막사의 부상자들이 다낭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독일 의료선으로 보내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난 3월2일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한다. 바다 위의 병원으로 이송된 할머니는 바로 수술실로 옮겨져 다리를 절단했고 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 날 버리고 가지 마.” 축 늘어진 딸이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손으로 엄마의 옷자락을 감아쥐고 놓지 않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할머니는 다리가 잘린 몸으로 온 병원 바닥을 기어다니며 딸아이를 찾아달라고 아무 다리나 붙들고 늘어졌다. 병원에는 죽은 베트남인 사체들을 바다에 내던진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굶주린 날치 떼에게 사람 몸을 던져주는 그런 반인륜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할머니는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결국 한 베트남 간호사가 그를 달래 병상으로 데려가서는 아이가 이미 죽었으며 다낭종합병원에 안치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다낭병원으로 이송된 주검은 하루 동안 가족이 인수하지 않을 경우 무연고자로 처리돼 행정관청이 매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여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럽과 틴이 시신을 찾아나섰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조문객 찾아올까 4일장으로 치른 장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은 산 채로 망령처럼 떠도는 삶을 몇 년이고 이어가야 했다. 할머니의 가족도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면서 하루하루 눈칫밥으로 연명하며 힘겹게 버텨가야 했다. 장남인 럽은 다낭에서 미군들이 먹을 프랑스빵을 구웠다. 할머니는 두 발목이 잘린 다리로 강중강중 종일 다낭 시내를 돌고 미군 부대를 전전하며 동냥길에 나섰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따이한’들이 던져주는 돈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하지만 한국 군인들에게 받은 돈은 꼭 따로 챙겼다. 할머니는 그 돈을 형제 앞에 주욱 늘어놓고 “자, 봐라! 내가 따이한에게 구걸해 온 돈이다”라고 매섭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네 여동생의 목숨값, 이것은 네 남동생의 목숨값, 그리고 이것은 네 아주머니의 목숨값….” 럽의 기억 속에는 입속말로 망자들을 부르며 꾸깃꾸깃한 돈을 손바닥으로 반듯하게 펴서 한장 한장 세던 어머니의 모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할머니의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졌다. 베트남은 보통 3일장을 지내는데 행여 멀리 한국에서 찾아오는 조문객이라도 있을까 하여 인민위원회와 하미유가족협회가 유족들과 논의해 결정한 것이다. 베트남의 상도(喪道)와 상례(喪禮)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망자를 제대로 애도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건지도 잘 몰랐다. 외국인 문상객이라고 유족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세심히 배려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룻밤이라도 할머니 곁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마침 다음날이 발인이기도 해서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밤을 지새워 빈소를 지키기로 했다. 한국의 장례식장처럼 질펀한 술판도 없고 베트남 어디에나 흔한 카드판도 없었지만 밤이 깊어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생전의 고인을 추억했다. 사람들은 얘기를 나누다가도, 잠시 평상 위에 고단한 몸을 눕혔다가도 간간이 제단으로 달려가 향을 켜들고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향불은 가장 검은 밤에 가장 환하게, 바람이 불수록 더욱 붉게 타오르며 밤새 끊이지 않고 할머니의 영정을 비추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동냥길에 나섰다

“따이한에게 구걸해온 돈이다

네 여동생, 남동생의 목숨값…”

아들은 이 모습을 평생 기억했다

10살 응우옌반펀, 5살 응우옌티씨

‘살육의 역사’ 문구 수정 압력에

연꽃으로 덮은 위령비에 새겨진

할머니 아들과 딸의 이름

죄지을 기회도 없던 이름 앞에서

나는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나 같은 사람 없어야 한다고,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군인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손주를 시켜 야자나무 열매를 따오게 하고 일본인이 선물한 귀한 차를 꽁꽁 숨겨 두었다가 우리에게 내주곤 했다.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아무 죄도 없는 젊은것들이 뭣 하자고 여그까정 왔어? 이를 어째, 이 불쌍한 것들을 어째!” 하며 할머니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떠나는 이들 한명 한명 안아주며 뺨에 입을 맞추고 등짝을 쓸어주었다. “어여 가, 어여 가!” 갈 길 멀다 걱정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울담을 떠나지 못하고 우리가 고샅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불편한 다리로 서서 하염없이 눈바래움(눈배웅)을 해주었다.

지난 3월 하미학살 45주년 위령제에는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참석했다. 내일, 어쩌면 하미의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가족을 불귀의 객으로 떠나보내고 두 발목이 날아간 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살아온 할머니를 끝내 한을 안은 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장한 걸음으로 찾은 자리였다. 그 일년 전인 2012년 1월 한국의 평화박물관 베트남 방문단이 하미 마을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눈물로 호소했다. 지난 세월 마을 사람들이 수십 번씩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한국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 저 억울한 135명의 넋들을 꼭 한 번만 달래주라고. 그곳에 가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불에 덴 자국처럼 남아 있는 하미의 깊은 슬픔이었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 그늘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었다. 거기, 하미에서 우리는 진실, 용서, 화해란 얼마나 사치스러운 단어인지를 절감했다.

위령비 속 1968년생들은 모두 ‘아무개’

하미 마을에는 2000년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에서 세운 비문 없는 위령비가 서 있다. 아니, 비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위령비 뒤편에는 추모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부터 모래언덕과 그 위에 자라는 나무는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 측에서는 이 비문을 문제 삼아 갖가지 회유와 압력을 가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이건 우리의 역사이고 과거이며, 진실”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베트남 중앙정부의 압박은 이기지 못하였다.

주민들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다”며 비문을 없애는 대신 커다란 연꽃무늬의 대리석으로 덮어버린다. 언젠가 다시 걷어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희망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하미 학살이 ‘두 번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하미 위령비는 그 기억마저 말살하려는 ‘2차 학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은 또다시 묻히고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엔 새살이 돋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그로부터 십년도 더 지나서 마을 인민위원회는 진실이 다시 햇빛을 보게 되길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하미 위령제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 종이에 인쇄한 비문을 선물한다. 비문을 받아든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업’이 어디까지일지 도무지 감당할 엄두를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비문으로 또다시 마음을 다칠 우리들을 염려했던 걸까?

 

관이 내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주가 옷자락에 흙을 받아 더듬더듬 관 위에 세 번 뿌렸다. 흙이 ‘좌르르’ 흘러내리는 소리가 가슴에서는 ‘와르르’ 돌탑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크게 울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화환에서 꽃을 뽑아 할머니의 관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손에도 노오란 국화 꽃잎을 한 움큼 쥐여주었다. 이제 이 세상의 한은 우리에게 다 주고 나비 날갯짓처럼 가볍게 가시라. 전쟁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는 말짱한 다리로 훠이훠이 자유로이 다니시라. 꽃잎들은 바람도 없는 허공을 날다가 함박눈처럼 할머니의 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꽃이 듬성듬성 뜯겨 나간 화환에서 근조 리본을 떼어내 문구가 위를 향하도록 해서 할머니의 관 위에 보를 덮듯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아프고 슬프고 죄송해요. 명복을 빌어요. - 곶자왈제주학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 장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문구들을 한자 한자 읽어내리는데 내게는 그것이 할머니와의 경건한 이별의식처럼 느껴졌다.

발인이 끝나고 잠시라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어진 나는 하미 위령비를 찾았다.

82 Nguyen Van Phan 1959

114 Nguyen Thi Xi 1963

수없이 이 비 앞에 섰지만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할머니 아이들의 이름이 먼저 눈에 화악, 들어왔다. 응우옌반펀 1959년생, 당시 열 살이던 할머니의 아들, 그리고 응우옌티씨 1963년생, 당시 다섯 살이던 할머니의 딸이다.

130 Nguyen Thi Hong 1967

131 Nguyen Van Teo 1967

132 Nguyen Van Tu

모두 1967년에 태어난, 응우옌티홍, 응우옌반떼오, 응우옌반뚜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던 두 살배기 아이들. 그들은 정식 이름을 지어주기에는 너무 어렸다.

133 Nguyen Vo Danh 1968

134 Nguyen Vo Danh 1968

135 Nguyen Thi Vo Danh 1968

학살이 일어나던 그해, 1968년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보자인(Vo Danh), 한자로는 무명, 우리말로는 ‘아무개’. 갓 태어나 미처 이름을 지어줄 틈도 없었던 갓난아이들이다. 설명을 보태자면, 응우옌은 성, 이름자에 티(Thi)가 들어가면 여자, 위령비 맨 오른쪽의 맨 끝줄에 있는 아이는 갓 태어난 무명의 여아였다. 짐작하겠지만 82, 114, 130, 131, 132…는 일련번호이다. 위령비에는 1880년에 태어난 할머니부터 1968년에 태어난 무명의 아기까지 그날 희생된 135명의 명단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거기, 하미 위령비에서, 할머니의 장례식 내내 터지지 않던 울음이 솟구쳐 올랐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이 아이들의 이름 앞에 나는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한참을 엎디어 있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용서’라는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홀연 떠났지만, 떠나보낸 기억이 없는 마음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할머니는 “갈 길 멀다. 어여 가, 어여 가!” 하며 자꾸만 내 등을 떠밀었다.

꽝남 하미마을/ 구수정 전 <한겨레21> 통신원·호찌민대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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