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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글로벌 상품은 銀

작성자
박두규
작성일
2013.07.10
조회수
5,092
첨부파일
-

세계 최초의 글로벌 상품은 銀

동아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9면의 TOP기사입니다.A19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A19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07-10 03:10 기사원문
 

[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스페인 은화의 유래

[동아일보]

세계 최초의 글로벌 상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비단 혹은 도자기? 아닙니다. 전 지구적으로 교환된 최초의 상품은 다름 아닌 은(銀), 스페인의 은화였습니다. 1545년경에 스페인인은 남미, 특히 페루(오늘날의 볼리비아)의 포토시에 거대한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잉카인은 포토시 은광을 발견해 오래전부터 신전을 장식하고 장신구를 만들어 왔습니다. 은광의 장소를 알아낸 스페인이 포토시를 차지하게 됐죠.

포토시의 은광은 스페인에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노천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발 약 4000m 높이의 산봉우리 자체가 거대한 은 덩어리였으니까요. 스페인은 이곳에서 채굴한 은을 활용해 스페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 새겨진 은화를 주조했습니다. 은화의 뒷면에는 사자와 성곽, 그리고 십자가를 그려 넣었죠.

은화는 라마나 당나귀를 이용해 태평양 해안으로 운반했습니다. 그곳에서 배로 파나마까지, 그리고 다시 육로로 카리브 해 해안으로 운반했습니다.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지 않았기에, 육상 및 해상 운송을 반복해야 했어요. 후에 포토시의 은은 쿠바의 아바나 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의 항구도시 세비야로 운반됩니다. 스페인은 엄청난 양의 은을 아메리카에서 가져왔지만, 잦은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했고 사치품을 구하는 데 국가 재정을 탕진했습니다.

스페인만큼은 아니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은 특히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그리고 차를 구입하기 위해 은을 마구 소비했습니다. 이렇게 포토시의 은은 유럽을 거쳐 최종적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포토시에서 채굴된 은 가운데 일부는 멕시코의 항구도시 아카풀코로 운반됐습니다. 16세기 이래 300여 년 넘게 동아시아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했던 아카풀코에서, 포토시의 은은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의 마닐라로 운송됩니다. 당시에 마닐라는 스페인의 식민지로서 스페인이 동아시아와 중국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곳에서, 스페인은 은화로 동아시아와 중국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구입했습니다. 동쪽으로 간 포토시의 은화도 결국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특히 금과 교환되면서 많은 은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16세기에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 대 6∼8이었지만, 유럽에서는 1 대 12였습니다. 유럽에서 금 1kg을 은 12kg으로 바꿔서 중국에 가져오기만 하면 1.5∼2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죠. 반대로 금을 중국에서 구입하여 유럽에 가져가 팔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환차익에 따른 금융 투기와 마찬가지 방식인 셈이죠. 은화는 물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화폐인 동시에 하나의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포토시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대신에, 아시아의 물품이 은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전 세계의 각지로 퍼졌습니다. 포토시도 예외는 아니었죠. 은이 포토시에서 빠져나가는 대신, 전 세계의 값비싼 물품이 포토시로 유입됩니다.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은 물론, 인도의 후추, 믈라카의 향수, 자바의 정향, 실론의 계피, 페르시아의 카펫, 프랑스의 모자, 독일의 칼,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유리 등.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물건을 포토시에서도 모두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인삼도 일본과 마닐라를 거쳐 아메리카에 소개됩니다.

이런 사치품은 포토시의 극소수만이 향유했습니다. 광산 노동자의 작업 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희미한 양초 불빛 아래에서 좁고 위험한 갱도에서 기어 다니며 6, 7일씩 일한 후에야 갱도에서 나왔습니다. 때론 무거운 은광석 주머니를 짊어지고 높이가 무려 250m에 달하는 사다리를 올라야 했습니다. 강제 부역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들을 포토시 광산에 보내면서 아예 장례식을 미리 치르기도 했습니다.

광산 노동자의 대부분은 부역민이 아닌 계약에 의한 자유 노동자였지만 이들도 죽음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은을 정련(精鍊)하기 위해 사용한 수은에 중독되어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포토시 광산을 ‘지옥의 입구’ 혹은 ‘사람을 잡아먹는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만으로는 광산 노동자를 충당하기 어려워지자 결국 아프리카에서 노동자를 불렀습니다. 매년 1500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가 유입됩니다. 포토시가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기간 아프리카 노예는 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수은 중독으로 쉽게 죽어 가는 노새를 대신해서 은화 주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이들도 원주민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노동을 견뎌 내기 위해서 마약 성분이 있는 코카를 씹으며 흥청망청 살아야 했습니다.

은광이 번창하던 1600년경 포토시의 인구는 16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중 약 15%가 광산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로 런던에 맞먹는 규모를 자랑했고, 글로벌 경제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16∼17세기의 세계 은 공급량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차지하는 비율은 85%에 달했는데, 대부분이 포토시에서 채굴된 물량이었습니다.

포토시는 전 지구 사회를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묶어 주었지만, 1800년 이후 은의 채굴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초라한 광산 마을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세계 경제와 인류 사회가 더는 이전과 같지 않았고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변했죠. 포토시의 은을 통해 전 세계는 하나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얽히면서 글로벌하게 변했습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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