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상반된 2차대전 '전범 재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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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05> 상반된 2차대전 '전범 재판'| 기사입력 2013-07-11 00:08 | 최종수정 2013-07-11 06:31유지혜 기자 최근 '전범(戰犯·war criminal)'이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일본에선 아베 신조 총리 등 관료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국제적 공분을 샀고, 독일에선 종전 70년이 지난 뒤 붙잡힌 '나치 전범' 얘기가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지요.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인 두 나라의 상반된 모습입니다. 이는 종전 직후 전범 단죄를 위해 열린 두 재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지혜 기자 전범 재판을 얘기하기 위해선 전쟁범죄에 대한 개념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침략 전쟁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식이 태동한 것은 20세기 이후. 1899년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두 차례의 만국평화회의에서 이런 논의가 시작됐다. 고종이 이준 열사 등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려 한 회의가 바로 1907년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다. 이 회의에서 '헤이그 조약'이 채택됐다. 독가스 사용 금지, 포로 학대 금지, 점령지 민간인 살상·약탈·강간 금지 등의 지상전 법규를 담은 국제조약이다. 1948년 11월 일본 도쿄 국제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일본 전범들(왼쪽)과 45년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세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모습. 두 재판은 과정과 결과가 사뭇 달랐다. [중앙포토] 국제법규로 명문화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가 수행한 전쟁에서 '개인'이 저지른 범죄를 단죄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국제사회에서 거의 형성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엄청난 인적 피해가 발생하자 침략전쟁으로 인류의 비극을 초래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가 행위와 별개로, 개인에게 국제적 형사 책임을 지우려는 첫 시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승전국들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맺고 그를 처벌할 별도 조항을 마련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난 틈을 타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도망쳤고, 네덜란드 정부가 그를 내놓으라는 연합국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빌헬름 2세는 처벌을 피했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처벌이 실제 이뤄진 건 2차 대전 이후다. 독일과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들은 적국 지도자와 군부 요인 등에 대한 처리를 논의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재판 없는 즉결처형을 주장했고, 미국은 재판 없는 처형은 미국의 법정의에 반한다고 맞섰다. 사형제가 없었던 소련 역시 미국에 힘을 보태 결국 국제재판이라는 형식이 채택됐다. 1945년 8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체결한 '런던 협정'을 통해서다. 주요 전범을 어떻게 기소하고 재판할 것인지 원칙을 정한 협정이다. 런던협정 6조는 '어떤 범죄를 취급할 것인가'를 담았다. ▶A항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침략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행했거나 이에 가담) ▶B항 통상의 전쟁범죄(Conventional War Crimes·포로나 민간인 살해, 학대, 약탈 등 전시 국제법 위반 행위) ▶C항 반인도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인종적 이유 등으로 대량 학살, 혹사, 노예화하는 등의 반인도적 행위) 등의 내용이다. 죄의 경중 아닌 종류따라 분류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B·C급 전범이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A급 전범이 B·C급 전범보다 더 악랄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인식돼있지만, 죄의 경중이 아닌 죄의 종류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A항을 위반한 전범이 A급 전범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두 전범 재판이 열렸다.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독일에서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일본 전범 처벌을 위해 일본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명 도쿄 재판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런던협정에 근거해 1945년 11월 시작됐고, 도쿄 재판은 태평양지역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의 특별선언에 따라 1946년 4월 시작됐다. 재판의 성격상 도쿄 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극동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범 처단이라는 같은 법정신으로 시작된 두 재판은 과정·결과에 있어 상이한 점이 많았다. 우선 기소 대상을 보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나치 전범 22명을 기소했다. 이들에게는 평화에 대한 죄, 통상의 전쟁범죄, 반인도범죄가 모두 적용됐다. 도쿄 재판에서는 전범 25명이 기소됐다. 55개의 죄목이 적용됐는데 36개는 평화에 대한 죄였고 3개만 통상의 전쟁범죄 및 반인도범죄였다. 일본의 침략 행위 처단에 재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현대사와 전쟁론을 전공한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 교수는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된 저서 『일본의 평화주의를 묻는다』에서 “도쿄 재판의 피고인들에게는 명목상 A·B·C급 범죄 모두가 적용됐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소 대상은 A·B급 범죄뿐이었다”고 전한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달리 일본 전범들의 반인도범죄는 경시된 것이다. 도쿄 재판에서 '재판하지 못한 전쟁범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의 아픔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 및 조선인 강제 연행 등이 바로 도쿄 재판에서 소홀히 한 반인도범죄에 속한다. 반인도범죄가 도쿄 재판에서 다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지만, 당시 도쿄 재판을 주도했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야시 교수는 “각국에서 파견된 11명으로 구성된 검사단에서 미국의 조셉 키넌이 수석검사를 맡았는데, 키넌은 처음에는 A급 범죄 처벌만으로도 충분하다며 B급 범죄는 다루지도 않으려고 했다. 맥아더 역시 진주만 공격 관련 처벌을 중시했으며, B·C급 범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각국 검사들이 일본의 방대한 잔학행위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 B급 범죄도 기소 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도쿄 재판, 미국 이해관계 작용 또 다른 이유는 피해국인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당시 전쟁범죄는 어디까지나 '적국 국민' 대상 범죄였다. '자국민' 대상 잔학 행위는 재판 대상이 아니었다. 식민지 국민도 자국민으로 보고 이들에 대한 반인도범죄는 재판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당시 전후 사법 처리를 주도한 서구 열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논리를 합당하게 받아들였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일찍이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통해, 영국은 2차 영일동맹(1905)을 통해 이미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속국인 조선 민중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학설도 있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이 독일 국적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전쟁범죄일까 아닐까. 앞의 논리대로라면 독일 국적의 유대인은 명백한 자국민으로, 전쟁범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셈이 된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정은 독일 국적의 유대인 학살도 엄연한 전쟁범죄로 인정했다. 이는 연합국 전쟁범죄위원회의 논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위원회에서는 나치가 시행한 같은 정책으로 인해 생긴 결과인데, 폴란드 국적 유대인 학살은 죄로 삼고, 독일 국적 유대인 학살은 죄로 보지 않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결론은 자국민이라고 해도 조직적 살육행위는 재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쿄재판에서 재판하지 못한 B·C급 전쟁범죄의 예를 하나 더 들면, 바로 731부대가 저지른 생체 실험이다. 2009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게재한 한국외국어대 이장희 교수의 『도쿄국제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비교 연구』에 따르면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재판 개시 직전 석방됐다. 소련과 중국은 강력히 반대했지만, 미국이 주도했다고 한다. 미 검사 키넌은 “지식의 보호는 인류의 책임”, “세균과 독가스에 관한 실적 보존”을 명분으로 기소를 면해줬다. 바로 이 무렵 이시이가 보관하던 연구업적 필름이 미국 세균화학무기 연구기지인 터틀릭연구소로 옮겨졌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인 22명 가운데 19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됐고, 이 중 12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형 확정 뒤 나치 2인자였던 괴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머지 사형수들은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쿄 재판에서는 25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교수형을 선고받은 7명은 판결대로 처형됐다. 하지만 연합국사령부는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의식한 조치'란 이유로 나머지 피고인들을 사면했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의 차이가 갖는 의미는 재판 이후 두 국가의 역사 청산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독일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낱낱이 드러난 나치의 반인도범죄는 그 자체로 독일 국민에 대한 교육적 역할을 했다. 특히 독일은 뉘른베르크 재판 정신을 잇기 위한 후속조치로 특별법들을 제정했고, 반인도범죄 처단을 국내 형법 규정으로 계승했다. 독일이 지금도 국내에서 전범 처벌 재판을 계속할 수 있는 근거다. 일본 전범들 사면 뒤 총리까지 하지만 도쿄 재판에서는 일본의 침략 행위가 주된 단죄 대상이 되다 보니 이후 개인의 잔혹 행위보다는 인간을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가는 전쟁의 광기를 탓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범 처벌 후속 법제정 등의 노력을 소홀히 한 것도, 사면된 전범들이 복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후에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 전후 우익 실세 고다마 요시오와 사사가와 료이치 등은 도쿄 재판에서 사면된 A급 전범들이다. 시계를 돌려 현재로 돌아와 보자. 80~90대의 고령이 된 나치 전범들은 지금도 쫓기고 있다. 1000명 이상의 나치 전범 기소를 주도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비젠탈센터(SWC)는 '작전, 마지막 기회'라는 전범 추적 캠페인(opera tionlastchance.org)을 통해 마지막 한 명까지 법정에 세우겠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 전범에 대한 형사 처벌 추진은 고사하고, 민사적 손해배상 청구 역시 법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정의를 실현할 법제도는 가해국인 일본에도, 피해국인 우리나라에도 없다. 미비한 법제도 전에 우리의 인식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저명한 '나치 헌터'였던 시몬 비젠탈의 저서 『해바라기』에는 그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장교의 어머니를 만나 한 말이 나온다. “독일인이라면 누구도 독일이 저지른 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록 죄가 없는 이라도, 최소한 수치심만큼은 공유할 수밖에 없다. 죄를 저지른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승객이 전차에 올라탔다가 그냥 내리는 것과는 다르다.” 피해국의 국민으로 사는 우리는 '최소한의 분노'는 공유하고 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