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파악하는 데 딱 3초"… 얼음같이 꿰뚫어 보고 봄볕같이 어루만지다
| 기사입력 2013-07-12 03:02
[롱런의 비결] 45년간 '특A급 현역' 지킨 드라마 작가 김수현
- 좌절도 했다
신춘문예 낙방 후 양인자에게 '쥐약 사오라" 하기도
- 안 쓰면 안 썼지 틀지 않는다
데뷔작 때 '멜로 넣어라" 방송국 요청대로 갔다 엉망… 원안대로 돌아와 시청률 1위
원래 하던 일 말고 다른 일 찾는 '인생 2막'이 유행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건, 좋아서 선택한 일을 평생토록 잘하는 '롱런(Long-Run)'이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의 한국 사회에, 롱런하는 사람들은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①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②개인의 실력·노력으로 ③20년 이상 뛴 A급 현역을 골랐다. 당사자에게 성공 요령을 묻는 대신 수십년 지켜본 지기들을 찾아가 '그 사람이 남들과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1968년 MBC PD가 점심 먹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전에 라디오 드라마 공모 예심을 했는데 본심에 넘길 작품이 없었다. 맥 빠져서 낙선작 더미를 헤집다 한 작품에 꽂혔다.
'중간부터 확 끌렸어요. 극본을 처음 쓰는지 작법은 영 엉성한데 대사가 신선했어요. 흔한 피륙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흰 옥양목이 한 필 펄럭이는 것 같았어요.'
PD는 그 자리에서 '한번 만나자"는 봉함엽서를 썼다. 그걸 받은 25세 응모자가 김수현(70)이다. 본명 김순옥. 고려대 졸업 후 잡지사 다니다 관둔 상태였다. 김순옥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건 소설'이라고 했다. PD가 '무슨 소리냐, 당신은 꼭 드라마 써야 한다'고 했다.
이후 45년간 김수현은 제일 비싸고 제일 바쁜 '특A급 현역' 자리를 한 번도 내준 적 없다. 올 3월 종편 드라마를 마치고 10월에 방영될 SBS 주말극을 쓰는 중이다. 김수현에게 '극본 쓰라'고 권한 PD가 김포천(79) 국악진흥회 이사장이다. 김수현이 왜 롱런하는지 물었다. '얼음 속에 봄볕이 든 사람입니다.'
얼음① 서론은 짧게
김수현은 1972년 첫 TV 드라마 '새엄마'를 썼다. 이후 줄곧 속필(速筆)이고 시놉시스가 짧다. 시놉시스는 드라마 얼개를 밝힌 글이다.
사극과 멜로가 대세일 때, '새엄마'는 젊은 후처가 대가족과 부대끼는 홈드라마였다. 드라마부장이 김포천이었다. '회사에서 '히트작 내라'고 닦달하는데, 하던 대로 해선 경쟁사를 못 당하겠어요. 미국·일본 책을 봤더니 '홈드라마가 트렌드'라고 해요. 김 작가가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TV는 홈 미디어'라고 했어요. 이 사람이랑 하면 뭔가 되겠다는 감(感)이 왔어요.'
회사는 황당해했다. '홈드라마? 그게 뭔데? 김수현? 그게 누군데?' 끝내 결론이 안 나 간부들이 사장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 김수현이 내놓은 시놉이 딱 한 장. 등장인물을 죽 적고, 이들이 좌충우돌한다는 게 다였다. 김포천이 그걸 들고 간부들 앞에서 '원맨쇼'를 했다. 간신히 '해보라"는 소리가 떨어졌다.
김희애(46)는 2003년 '완전한 사랑'으로 김수현 작품에 첫 출연했다. '시놉이 정말 짧아요. '이게 시놉이야, 대본이야?' 싶은 경우도 많은데 선생님은 길어야 대여섯 줄 써요. 장황하지 않아요. 근데 포스(force)가 있어요. 핵심이 다 들어 있어요.'
얼음② 꿰뚫어봐라
드라마도 본론으로 직진한다. 치매면 치매, 불륜이면 불륜. 명쾌하게 패를 보여준 뒤 속도와 깊이로 시청자를 붙들어 맨다. 얼토당토않은 비약 대신, 모든 배역에 '그 순간 그렇게 말해야 할 사정'이 있다. 김희애는 '대사를 한 번 외울 때랑 여러 번 외울 때 의미가 천양지차"라고 했다.
'실제 삶에서 수학 공식처럼 얘기하지 않잖아요? 이 얘기 하다 잠깐 다른 일 하고, 속으론 아까 그 얘기를 따라가다가 불쑥 툭 뱉죠. 선생님은 그런 흐름이 살아있게 써요. 전율이 와요. 다이아몬드가 꽉 찬 광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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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기자 |
1987년 '사랑과 야망' 시청률이 76%를 찍었다. 문학평론가 임우기(57)도 빨려 들어갔다. 김수현 대본을 샅샅이 읽고 비평집도 펴냈다. '순수·대중문학을 막론하고 진짜 '큰 무당'은 박경리와 김수현 두 분이에요. 쥐어짜듯 이야기를 짓거나 작가가 나서지 않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자기 목소리로 떠들고 자기 식대로 살아가도록 풀어놨어요. 실제로 김수현을 만나보면, 누굴 보고 파악하는 데 딱 3초 걸리는 사람이에요.'
얼음③ 하루에 두 권 읽어라
드라마 '곰탕'을 쓴 박정란(72). 김수현과 같은 해 데뷔한 평생 친구다. '그 친구만큼 인간 유형을 깊이 아는 사람이 없어요. 젊어서부터 무지막지하게 읽었어요. 하룻밤에 두세 권 읽어요. 드라마는 인간을 보여주고 인간의 별미는 대사예요. 김수현은 타고난 감수성을 방대한 독서로 뒷받침했어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랫말을 쓴 양인자(68). 김수현과 함께 잡지사에 다녔다. '밤늦도록 교정 보며 그 양반 기사를 다 읽었어요. 거기서 글맛을 배웠어요. 항상 두 가지를 강조했어요. '글을 쓸 때 위에서 내려다봐라. 밥 먹고 써라.' 졸려서 못 쓰겠다며 원고를 밀어버리는 동료 작가를 보고 이랬어요. '어떻게 할 일이 있는데 잠이 오니?''
얼음④ 칼같이 잘라라
1991년 배우 윤여정(67)이 '사랑이 뭐길래'를 찍다 쓰러졌다. 김수현은 윤여정이 1~132쪽까지 내리 나오는 대본을 냈다. 윤여정이 분장실에서 링거 맞고 비실비실 녹화장에 올라갔다. 연출 박철(75)이 기막혀했다. '니 김수현이랑 친한 거 맞아?' 윤여정이 그날 일을 책에 썼다.
'집에 오자마자 김수현씨가 '안 죽었니?' 했다. '박철씨가 당신 잔인하대. 쓰러진 거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대사를) 많이 쓰느냐고.' 이런 때 그이는 인사불성으로 악을 쓴다. '너 쓰러졌다고 니 분량 줄여주면 다른 배우들 일할 맛 안 나! 난 바보하고 응석 많은 인간하고 비굴한 인간이 젤 싫어! 너 지금 세 가지 다 하고 있어!'
'새엄마'는 초반 시청률이 죽을 쒔다. 방송국에서 '멜로를 넣으라"고 아우성쳤다. 새엄마 전양자(71)와 남편 최불암(73) 사이에 오지명(74)을 넣었다. 효과는 없고 흐름만 헝클어졌다. 김수현이 제작진에게 '한강에 뛰어들 각오를 하자'고 했다. 원안대로 돌아온 뒤 시청률이 1위까지 쭉 솟았다. '새엄마'는 이듬해 411회로 끝났다. 이후 김수현은 안 쓰면 안 썼지 틀지 않았다.
봄볕① 인생에 응석부리지 마라
김수현은 청주에서 전파상 집 딸로 자랐다. 대학 때부터 가장이었다. 잡지사 시절 신춘문예에 떨어진 뒤 양인자에게 '이따가 쥐약 좀 사오라"고 했다. 양인자가 엉겁결에 사다줬다 편집장에게 된통 혼났다.
김수현은 문학도와 결혼했다. 부부 모두 순수문학으론 대성하지 못했다. 헤어진 뒤 김수현이 드라마 써서 딸을 키웠다. 단막극 빼고 주말극·일일극만 1년에 2편씩 썼다. 밤새워 '칼마감' 하고 당일 오후 대본 독회(讀會)를 했다. '김수현 드라마 할 땐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고 했다. 그 시간엔 화장실 물 사용량이 줄고 통화량이 줄었다. 홍진기 TBC 회장과 최석채 MBC 회장이 '데려가겠다' '그럼 전쟁이다' 하고 맞붙은 적도 있다.
양인자가 '돈에 대한 그 양반 생각은 돌직구였다"고 했다. '방송으로 돌아선 이유를 이렇게 말했어요. '돈은 방송국에 있어.''
봄볕② 의리를 지켜라
전양자는 '새엄마'부터 '무자식 상팔자'까지 41년 함께 일했다. '대다수 사람은 앞에서만 좋은 척하는데, 김 작가는 그런 '척'을 안 해요. 남이 난감한 일을 상의하면, 흘려듣지 않고 마음을 다해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저도 두세 번 상의했어요. 저는 이[齒]가 다 빠져도 '인간 김순옥 여사'랑 못다 한 인생 얘기를 두런두런 나눌 거예요.'
박정란은 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선배들이 몇 살까지 쓰느냐에 따라 후배들의 목적지와 각오가 달라지고, 하다못해 교통사고 보상금도 달라져요. 한 작가가 여든까지 쓰면 모든 작가에게 가능성이 열려요.'
[김수혜 기자]